三 國 遺 事 卷 第 三
삼 국 유 사 권 제 삼
興法第三
흥법제삼
順道肇麗(道公之次.亦有法深,義淵,曇嚴之流.相繼而興敎.然古傳無文.今亦不取編次.詳見僧傳.)
순도조려(도공지차.역유법심,의연,담엄지유.상계이흥교.연고전무문.금역불취편차.상견승전.)
순도를 처낸 고구려(순도 공적은 다음에 또 법으로 깊게 있다. 의연과 담엄과 흘러가는데 서로에 계통에서는 흥교하고 그렇게 고전을 해도 문자가 없다. 지금 역시 편집하여 뽑지 않은 다음인 것이다. 해동고승전을 자세히 보아라)
高麗本記云.小獸林王卽位二年壬申.乃東晉咸安二年,孝武帝卽位之年也.前秦符堅遺使及僧道.送佛像經文.(時堅道關中.卽長安.)又四年甲戌.阿道來自晋.明年乙亥二月.創肖門寺,以置順道.
고려본기운.소수림왕즉위이년임신.내동진함안이년,효무제즉위지년야.전진부견유사급증도.송불상경문.(시견도관중.즉장안.)우사년갑술.아도래자진.명년을해이월.창초문사,이치순도.
고구려 본기에 전한다. 소수림왕 즉위하신 2년은 임신년이다. 동진시대에서도 함안 2년은 동진 효무제가 즉위해온 년도다. 전진 지역에서 부견과 사신이 분실하였는데 요령으로 경학 문자 형상에서 부처님을 보낸 것이다(때에 부견은 관중가는 길이었으니 장안지역이다)또 4년 갑술년에 아도는 진국을 자진하면서 을해년이 되어서야 2월에 초문사 창궐현장에 순도를 놓기 하는 것이다.
又創伊弗蘭寺,以置阿道.此高麗佛法之始.僧傳作二道來自魏云者,誤矣.實自前秦而來.又云肖門寺今興國,伊弗蘭寺今興福者,亦誤.按麗時都安市城.
우창이불난사,이치아도.차고려불법지시.증전작이도래자위운자,오의.실자전진이래.우운초문사금흥국,이불란사금흥복자,역오.안려시도안시성.
또 이불난사를 창궐하는데 아도를 둔다. 둔다는 것에는 고구려 불법이 시작하였다. 일찍이 전해지는 것은 이도가 제작한 것에 출처가 위나라 라고 한다는 것은 오류다. 실제로는 부견시대를 맞이해 온 전진이다. 또 초문사는 인제 생겨난 신생국 영지에 있어서 이불란사 역시 신생국에 복준다고 하는 것 역시 오류다. 안려 때에 도읍은 안시성이다.
一名安丁忽.在遼水之北.遼水一名鴨淥.今云安民江.豈有松京之興國寺.名讚曰鴨淥春深渚草鮮.白沙鷗鷺等閑眠.忽驚柔櫓一聲遠.何處漁舟客到煙.
일명안정홀.재요수지북.요수일명압록.금운안민강.기유송경지흥국사.명찬왈압록춘심저초선.백사구로등한면.홀경유로일성원.하처어주객도연.
안정홀 이라는 동네는 요수에서 북쪽인데 요수는 압록을 이름한다. 인제부터는 안민강 이라는 것이다. 송경을 어찌 흥국사 라고 있는가. 명부 편찬을 해본곳에서는 압록은 봄 깊은 날에는 수변지역에 잡초가 선명하다. 백사 갈매기 해오라기가 막혀야 잠든다. 놀라움을 부드럽게 하는 노병이 내는 소리가 멀면 어부와 주객이 산다는 곳에는 연기가 퍼진다.
難陁闢濟
난타벽제
百濟本記云.第十五(僧傳云十四誤.)沈流王卽位甲申.(東晋孝武帝大元九年.)胡僧摩羅難陁至自晋.迎置宮中禮敬.明年乙酉.創佛寺於新都漢山州.度僧十人.此百濟佛法之始.
백제본기운.제십오(증전운십사오.)침류왕즉위갑신.(동진효무제대원구년.)호증마라난타지자진.영치궁중예경.명년을유.창불사어신도한산주.도증십인.차백제불법지시.
백제본기를 본다. 15대(해동고승전에 14는 오류다) 침류왕이 갑신년에 즉위한다(동진국 효무제 대원 9년 쯤이다)오랑캐인 마라난타가 진국 도착을 서둘렀다. 궁중에서는 예절과 공경으로 맞이하였다. 명년을 맞이한 을유년에는 불사를 창궐하는데 예 도읍지 한산주로 하였다. 한산주 제도권에는 10명이 모여지자 백제 불법 시대 시작을 알린다.
又阿莘王卽位大元十七年二月,下敎崇信佛法求福.摩羅難陁,譯云童學.(其異迹詳見僧傳)
讚曰.天造從來草昧間.大都爲伎也.應難,翁翁自解呈歌舞.引得旁人借眼看.
우아신왕즉위대원십칠년이월,하교숭신불법구복.마라난타,역운동학.(기이적상견승전)
찬왈.천조종래초매간.대도위기야.응난,옹옹자해정가무.인득방인차안간.
또 아신왕이 즉위하면서 대원 17년 2월에 신은 높은 가르침이니 불법을 통하여 복을 구원하여라고 내리는데 마라난타가 주도하였다. 번역해보니 동학이다(다른 흔적은 해동고승전을 살펴라) 편찬하여 말한다. 천조국을 쫓아오는 잡초는 새벽 틈에서 큰 도읍지가 만들어낸 기술이다. 호응하기 어렵다. 노인이 해석을 해내자 가무를 드리니 나라 사람이 차용을 하고 눈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인기를 획득하였다.
阿道基羅(一作我道.又阿頭)
아도기라(일작아도.우아두)
아도기라. 아도 아두로 쓰였다.
新羅本記第四云.第十九訥祗王時,沙門墨胡子,自高麗至一善郡.郡人毛禮,(或作毛祿)於家中作堀室安置.時梁遣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元.梁遣使僧曰元表.宣送溟檀及經像)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遣人齎香,遍問國中.墨胡子見之曰.此之謂香也.
신라본기제사운.제십구눌지왕시,사문묵호자,자고려지일선군.군인모례,(혹작모녹)어가중작굴실안치.시양견사사의착향물(고득상영사시원.양견사승왈원표.선송명단급경상)군신불지기향명여기소용.견인재향,편문국중.묵호자견지왈.차지위향야.
신라본기 4편을 본다. 제19 눌지왕 시절에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을 오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례라고 하거나(모녹이라 하거나)집에서 굴실을 만들고 안전하게 두었다. 시절에 양나라 사신이 파견오면서 사의에서는 향기에 만물이 붙어 있는 것을 선물하던 날이다(오랜 역사로 써낸 시를 읊는다. 양나라가 파견한 사신은 원표 스님이고, 박달나무 진명해 둔 상태에 형상을 본뜬다)군신이 아니면 안다는 향기에 명칭은 사용자가 주는 것이다. 파견간 사람이 향기를 가져오니까 나라 전체에 골고루 설문하더니 묵호자가 보고 말한다. 향이다.
焚之則香氣芬馥.所以達誠於神聖.神聖未有過於三寶.若燒此發願.則必有靈應.(訥祗在晋宋之世.而云梁遣使.恐誤)時王女病草.使召墨胡子,焚香表誓.王女之病尋愈.王喜,厚加賚貺.俄而不知所歸.
분지칙향기분복.소이달성어신성.신성미유과어삼보.약소차발원.칙필유령응.(눌지재진송지세.이운양견사.공오)시왕녀병초.사소묵호자,분향표서.왕녀지병심유.왕희,후가뢰황.아이불지소귀.
분사기를 본 떠본 향은 향답게 하는 것이니 정성껏 사용하여야 신성행을 한다. 신성이 있지를 않으면 3보가 지나치는 것이다. 분사할 때에 발원하기는 반드시 유령이 호응한다는 것이다. (눌지왕은 송나라 세상을 향하여 가봤는데 양나라가 사신을 파견했다는 흔적은 오류를 두려워한 것이다)때에 왕녀가 잡초병에 시달리니 사신에게 묵호자를 소환하였다. 분사하는 향기 표문에 맹세하기를 왕녀에 병을 찾ㅇ았으면 낳아라. 기쁜 임금은 뇌물을 주는데 무겁게 하신 것이다.
又至二十一毗處王時.有我道和尙.與侍者三人.亦來毛禮家.儀表似墨胡子.住數年.無疾而終.其侍者三人留住,講讀經律.往往有信奉者(有注云,與本碑及諸傳記殊異.又高僧傳云西竺人.或云從吳來)按我道本碑云.我道高麗人也.
우지이십일비처왕시.유아도화상.여시자삼인.역래모례가.의표사묵호자.주수년.무질이종.기시자삼인류주,강독경율.왕왕유신봉자(유주운,여본비급제전기수이.우고승전운서축인.혹운종오래)안아도본비운.아도고려인야.
또 21대 비처왕 시대에서는 아도화상에게는 시중드는 자 3명이 함께 있던 때에 또 모례집으로 오니 묵호자를 닮아서 풍속 표면상 수년째 살았다. 없던 병이 멈추면 끝내는 것이다. 시중드는 자 3인은 머물다가 살면서 경율 위주로 강독을 하면서 신봉자가 있는 곳으로 왕래하였다 (주석을 본다. 밑 기둥에서 전하는 모든 전기는 사살이 다르다. 고승전에서는 서축인 이라고 하고 오나라에서 온 것이다고 한다)본비에 따르는 아도 흔적에서는 고구려인이라는 것이다.
母高道寧.正始間,曹魏人我(姓我也)崛摩奉使句麗私之而還.因而有娠.師生五歲.其母令出家.年十六歸魏.省覲崛摩.投玄彰和尙講下就業.年十九,又歸寧於母.
모고도녕.정시간,조위인아(성아야)굴마봉사구려사지이환.인이유신.사생오세.기모령출가.년십육귀위.성근굴마.투현창화상강하취업.년십구,우귀녕어모.
엄마는 고구려 사람 도녕이다. 위나라 사람에서 갖춰진다(조씨다) 봉사하는 사신은 굴마요. 고구려가 독식하기 멈추고 되돌아온다. 임신이 원인이다. 사부님은 5년을 연습하셨다. 엄마 역시 출가하셨다. 16년이 되더니 위나라로 귀국하는데 굴마 보기를 살피고 현창화상에게 투항을 시키시고 강습은 취업시까지 하였다. 19년에는 엄마에게 귀가하여서 안녕을 하였다.
母謂曰,此國于今不知佛法.爾後三阡餘月,鷄林有聖王出.大興佛敎.其京都內有七處伽藍之墟.一曰,金橋東天鏡林.(今興輪寺.金橋謂西川之橋.俗訛呼云松橋也.
모위왈,차국우금불지불법.이후삼천여월,계림유성왕출.대흥불교.기경도내유칠처가람지허.일왈,금교동천경림.(금흥륜사.금교위서천지교.속와호운송교야.
엄마가 대답을 한다. 이런 나라는 불법을 알지 않는다. 지금 이후로 3천여 달동안이다. 계림 소재지에서는 성왕이 출사해 있다고 하는데 흥불교가 크다. 도읍에서는 7개 가람터가 언덕에 있다. 하나는 금교동에 천경림이다 (흥륜사는 금교에서 서천다리이며 풍속을 속여왔지만 송교라 한다.
寺自我道始基.而中廢.至法興王丁未草創.乙卯大開.眞興王畢成)二曰,三川岐.(今永興寺.與興輪開同代)三曰,龍宮南(今皇龍寺.眞興王癸酉始開)四曰,龍宮北(今芬皇寺.善德甲午始開)五曰,沙川尾.(今靈妙寺.善德王乙未始開)六曰,神遊林(今天王寺,文武王己卯開)七曰,婿請田(今曇嚴寺)皆前佛時伽藍之墟.法水長流之地.爾歸彼而瀋揚大敎.當東嚮於釋祀矣.
사자아도시기.이중폐.지법흥왕정미초창.을묘대개.진흥왕필성)이왈,삼천기.(금영흥사.여흥륜개동대)삼왈,룡궁남(금황룡사.진흥왕계유시개)사왈,룡궁북(금분황사.선덕갑오시개)오왈,사천미.(금령묘사.선덕왕을미시개)육왈,신유림(금천왕사,문무왕기묘개)칠왈,서청전(금담엄사)개전불시가람지허.법수장유지지.이귀피이심양대교.당동향어석사의.
아도가 처음 사찰을 닦았다. 폐지를 멈췄다. 법흥왕이 정미년에 풀밭에서 창사하였다. 을묘년에 크게 열었다. 진흥왕이 종필로 완성하였다)두 번째는 삼천기다 (영흥사에 존재하고 흥륜사가 열리며 한가지로 대신하였다)세 번째는 룡궁남쪽이다 (황룡사다 진흥왕이 계유년에 처음 열었다)네 번째는 룡궁북쪽이다 (분황사 소재지이며 선덕왕이 갑오년에 처음 열었다)다섯 번째는 사천 미곡이다 (령묘사 소재지이며 선덕왕이 을미년에 처음 열었다)여섯 번째는 신유림이다 (천왕사 소재지이며 문무왕이 기묘년에 열었다)일곱 번째는 서청전이다 (담엄사다) 모두가 부처 때를 앞서 가람에 언덕이다. 법물이 길게도 흘러다니는 땅에는 귀가하는 공간이 심양대교다. 동향을 맡았는 심양대교가 제사까지도 풀어낸다.
道稟敎至鷄林.寓止王城西里.今嚴莊寺.于時未雛王卽位二年癸未也.詣闕請行敎法.世以前所未見爲嫌.至有將殺之者.乃逃隱于續林(今一善縣)毛祿家.(祿與禮形近之訛.古記云,法師初來毛祿家.時天地震驚.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彡麽.彡麽者乃鄕言之稱僧也.猶言沙彌也)
도품교지계림.우지왕성서리.금엄장사.우시미추왕즉위이년계미야.예궐청행교법.세이전소미견위혐.지유장살지자.내도은우속림(금일선현)모록가.(녹여예형근지와.고기운,법사초래모록가.시천지진경.시인불지증명.이운아두삼마.삼마자내향언지칭승야.유언사미야)
계림에 도착하여 고령이 도품하는데 왕성 서리 모텔에서 멈춘다. 엄장사다. 미추왕이 때 맞춰 즉위한지 2년이 되어가는 날 계미년이다. 궁궐에서 요청하여 교법이 수행하는데 세상이 앞서지 않은 것을 보면 혐이라 하였다. 도살장 종사자들이 있었으니 속림으로 가기를 도망가고 은거하려고 하였다(일선현이다) 모록네 집이다. (모록이 본 뜬 것이 예절에 가깝다는 건 잘못이다. 옛 기록이다. 법사가 처음 모록가를 방문하고서 하늘이 때 맞춰 벼락치니까 때 맞춰서 사람들이 일찍부터 명단을 알지 않았다. 아두삼마가 멈춰져 있는데 삼마라는 것은 시골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에서 스님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미로 존재하였다)
三年時,成國公主疾.巫醫不效.勅使.四方求醫.師率然赴闕.其疾遂理.王大悅.問其所須.對曰.貧道百無所求.但願創佛寺於天鏡林.大興佛敎.奉福邦家爾.王許之.命興工.俗方質儉.編茅葺屋.住而講演.時或天花落地.號興輪寺.毛祿之妹名史氏.投師爲尼.
삼년시,성국공주질.무의불효.칙사.사방구의.사솔연부궐.기질수리.왕대열.문기소수.대왈.빈도백무소구.단원창불사어천경림.대흥불교.봉복방가이.왕허지.명흥공.속방질검.편모즙옥.주이강연.시혹천화락지.호흥륜사.모록지매명사씨.투사위니.
3년 때에는 나라에 공주가 병이 생겨나더니 무당과 의원은 효가 아니다. 사신에게서 칙서를 반포하는데 의원을 구한다고 전국을 떠돈다. 사부님이 통솔하고 궁궐로 진행을 하니 병을 수리하였다. 기쁜 임금은 누구네 소행이냐고 물으시는데 대답을 하였다. 가난은 일백번도 없는데 구조하였다는 것은 천경림에 불사를 창궐하여서 쓸데 없는 소원만이 생겨나니까 불교가 크게 일어났다. 복 받들어가기를 나라 가족 개인에게서 득템하니까 임금도 허락을 하는데 장인에게 명령을 내려라. 본질을 검소하게 하여라. 기울어진 집은 띠로서 엮어라. 살다가도 강연을 하여는 것이다. 때에 천화가 땅에 추락을 하니 흥륜사로 불렀고 모록에서 누이 사씨는 사부님에게 투항하면서 여승이라 하였다.
亦於三川岐.創寺而居.名永興寺.未幾,未雛王卽世.國人將害之.師還毛祿家.自作塚,閉戶自絶.遂不復現.因此大敎亦廢.至二十三法興大王.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乃興釋氏.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道寧所言三十餘月驗矣.
역어삼천기.창사이거.명영흥사.미기,미추왕즉세.국인장해지.사환모록가.자작총,폐호자절.수불부현.인차대교역폐.지이십삼법흥대왕.이소량천감십삼년갑오등위.내흥석씨.거미추왕계미지세이백오십이년.도녕소언삼십여월험의.
하천 3개 갈림길에서 사찰 창궐지가 있으니 영흥사가 이름한다. 낌새가 없을 때 미추왕이 즉위하던 세상이다. 나라 사람들이 사살하려는데 스승님이 모록집에서 되돌아온다. 총을 자작하였다. 닫히면 끊어지는 것으로 하였고 수행이 아니어도 다시 재현하였다. 큰 가르침도 폐지하는데 법흥대왕 23년간 지속하였다. 천감 13년은 갑오년에 소량으로 인하여 등위하였다. 이 때에 석씨 해석하기가 생겨나더니 미추왕이 계미년까지 250년간 지속하였다. 도녕이 말해온 30여년을 증험하던 것이다.
據此,本記與本碑,二說相戾,不同如此.嘗試論之.梁唐二僧傳,及三國本史皆載,麗濟二國佛敎之始,在晋末大元之間.則二道法師,以小獸林甲戌.到高麗明矣.
거차,본기여본비,이설상려,불동여차.상시논지.양당이승전,급삼국본사개재,려제이국불교지시,재진말대원지간.칙이도법사,이소수림갑술.도고려명의.
증거다. 신라본기는 비석이 본문이다. 글 두 개라서 틀리는 걸 보아라. 아니면 한 가지로 보아라. 일찍부터 시험해온 것은 양나라 당나라 이승전이다. 삼국사기에 몽땅 게재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두 개 국가에서 불교 시작은 진나라 말년에 으뜸 취급하던 틈이다. 이도법사 본뜨기는 소수림왕이니 갑술년부터다. 고구려가 밝은 어둠에 빠졌다.
此傳不誤.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則是阿道留高麗百餘歲乃來也.雖大聖行止出沒不常.未必皆爾.抑亦新羅奉佛.非晩甚如此.又若在未雛之世.則却超先於到麗甲戌,百餘年矣.于時鷄林未有文物禮敎.國號猶未定.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又不合高麗未到而越至于羅也.
차전불오.약이비처왕시방시도라.칙시아도유고려백여세내래야.수대성행지출몰불상.미필개이.억역신라봉불.비만심여차.우약재미추지세.칙각초선어도려갑술,백여년의.우시계림미유문물예교.국호유미정.하가아도래청봉불지사.우불합고려미도이월지우라야.
지금 전하는 것은 아니다. 오류라면 비처왕 시대에 라국에서 시작하였다. 아도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출몰하다가 세상에 왔다. 김대성이라 하여도 멈추고 출몰하기는 항상 아니다. 반드시 아니다. 모두가 너희다. 억압도 하고 신라가 불교 봉인하기는 안했다. 흐름이라서 심했다. 만약에 미추 세상을 본다. 각초에 먼저 고구려 갑술년이었으니까 100여년이다. 넘어간 계림에서는 문물예교가 있지 않았다. 국호도 정하여지지 않았다. 아도 라고 하여도 불자 요청에 따라 불교 봉인하기가 얼마나 하겠냐는 것이다. 또 고구려와도 합하여지지 않았는데 라국을 넘었다는 것 역시 뭐냐는 것이다.
設使暫興還廢.何其間寂寥無聞.而尙不識香名哉.一何大後.一何大先.揆天東漸之勢.必始于麗濟而終乎羅.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阿道之辭麗抵羅.宜在訥祗之世.又王女救病.皆傳爲阿道之事.則所謂墨胡者非眞名也.
설사잠흥환폐.하기간적요무문.이상불식향명재.일하대후.일하대선.규천동점지세.필시우려제이종호라.칙눌지기여수림세상접야.아도지사려저라.의재눌지지세.우왕녀구병.개전위아도지사.칙소위묵호자비진명야.
사신이 잠시 흥행하고 돌아오면 폐지한다고 말하니까 어느 틈에서도 외로움은 없다. 듣는다. 바라지도 않거든 향기 명단이 갖는 재앙이라 하겠는가? 하나라도 커지다가는 재앙인데 하나라도 커지다가는 앞서서다. 하늘이 동점을 차지할 것 같아서 고구려와 백제가 종말을 맞이하는 거 같았다. 라국은 눌지왕이 소수림왕 시대와 접속하고 있었다. 아도가 하는 말은 고구려가 라국을 막아서라는 것이다. 눌지왕 시대에서는 마땅히 하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왕녀에게 병을 구원해줄 자가 한결같이 아도가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묵호자가 아닌 진짜 명단이라고 칙서를 내렸다.
乃指目之辭.如梁人指達摩,爲碧眼胡.晋調釋道安,爲柒道人類也.乃阿道危行避諱.而不言名姓故也.蓋國人隨其所聞.以墨胡,阿道二名.分作二人爲傳爾.況云阿道儀表似墨胡.則以此可驗其一人也.
내지목지사.여양인지달마,위벽안호.진조석도안,위칠도인류야.내아도위행피휘.이불언명성고야.개국인수기소문.이묵호,아도이명.분작이인위전이.황운아도의표사묵호.칙이차가험기일인야.
손짓과 눈알이 굴러가다가 양나라 사람이 달마 가리키기를 따라 하였으니 오랑캐 벽안이라 하였다. 진나라도 석도안이 조절하였으니까 인류를 7도로 하던 것이다. 아도는 위험하면 피하기 꺼리기를 하였다. 말하지는 않았는데 고씨다. 나라 사람들이 소문을 듣다가 덮었다. 묵호와 아도 이름이다. 위인전을 나눠서 제작하여라. 아도는 묵호에서 도플갱어다. 칙령으로 증명을 하였는데 1명이라는 것이다.
道寧之序七處.直以創開先後預言之.兩傳失之.故今以沙川尾躋於五次.三千餘月.未必盡信.蓋自訥祗之世,抵乎丁未.无慮一百餘年.
도녕지서칠처.직이창개선후예언지.양전실지.고금이사천미제어오차.삼천여월.미필진신.개자눌지지세,저호정미.무려일백여년.
도녕은 차례대로 일곱 군데에 살았다. 직을 만들어내더니 먼저 열고 나중에 참여한다고 알렸다. 양나라 당나라 전달이 잘못이다. 오래동안 사천미제는 5공간으로 하였다. 다음으로 3천여 달이다. 반드시 믿음이 소진하는 것도 아니다. 눌지 시대에 덮어 둔 곳은 정미년에 막은 것이다. 1백년 생각하기도 없다.
若曰一千餘月.則殆幾矣.姓我單名.凝贋難詳.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始關中人.自出家已後.多有異迹.晋孝武大元年末.齎經律數十部.往遼東宣化.現授三乘.立以歸戒.蓋高麗聞道之始也.
약왈일천여월.칙태기의.성아단명.응안난상.우안원위석담시(일운혜시)전운.시관중인.자출가이후.다유이적.진효무대원년말.재경율수십부.왕요동선화.현수삼승.입이귀계.개고려문도지시야.
만약에 1천여 달은 위험이라는 계략이다. 성은 아 이름은 단. 걸치지 않았으니 어렵다. 자세하여라. 위나라에서 담시가 해석한 것을 으뜸으로(혜시라고도 한다) 삼는 것이 있는데 관중 사람이 시작하였다. 출가하는 이후에는 다른 흔적이 많이 존재하는데 진나라 효무제 대원 말년에는 경률 수십가지 부문을 챙기더니 요동에 가서 선화를 하고서 3승기를 수여받음을 재현하였다. 계율로 귀가하자는 입장은 고구려 문도에서 시작을 덮었다.
義凞初復還關中.開導三輔.始足白於面.雖涉泥水.未嘗沾濕.天下咸稱白足和尙云.晋末,朔方凶奴赫連勃勃.破獲關中.斬戮無數.
의희초부환관중.개도삼보.시족백어면.수섭이수.미상첨습.천하함칭백족화상운.진말,삭방흉노혁연발발.파획관중.참륙무수.
관중지역으로 다시 돌아온 의희 초기에서는 3보를 리더로써 개방하다가 처음 낯빛이 소녀상이 시작하였다. 이수를 건널까 말까 시험을 하기에는 습기 상태가 첨가하지가 않아서 천하 모두가 구칭하는 백족화상에게로 연락을 하던 것이다. 진나라 말년은 흉노족이 삭방지역에서 발지역으로 눈에 띄니 관중을 얻어야만 파괴가 가능하던지라 참수자 사형자가 없을만큼 세어보았다.
時始亦遇害.刀不能傷.勃勃嗟嘆之.普赦沙門,悉皆不殺.始於是潛遁山澤.修頭陁行.拓拔燾復剋長安.擅威關洛.時有博陵崔皓.小習左道.猜嫉釋敎.旣位居爲輔.爲燾所信.乃與天師寇謙之說燾,佛敎無益,有傷民利.
시시역우해.도불능상.발발차탄지.보사사문,실개불살.시어시잠둔산택.수두타행.탁발도부극장안.천위관락.시유박능최호.소습좌도.시질석교.기위거위보.위도소신.내여천사구겸지설도,불교무익,유상민리.
시절은 해로움과 우연이 교차하여서 칼쓰기가 아니면 상처입는다. 발 지역에서는 탄식이 생겨나는데 사문을 널리 용서하자는 것이다. 몽땅 살인을 한 것은 아니다. 때에 둔산 못이 잠겨 있어서 두타행을 수습하고 있는데 탁발수습이 장안행을 이겨서 덥다는 것이다. 으르렁 대는 관락 지역은 멋대로 하는 것이다. 때에 최호 능이 넓게 존재하고 있어서 조금 실습해내는 좌도로 석교를 샘내고 미워하고 있으니까 거위보물이 범람을 하는 것이다. 위도가 소신껏 해보니 내 하늘인 사구는 겸손하게 도를 말한다는 것이다. 불교란 이익이 없으며 상처 있는 백성만이 이득실현을 한다는 골자를 드러낸 것이다.
勸令廢之云云.大平之末.始方知燾將化時至.乃以元會之日.忽杖錫到宮門.燾聞令斬之.屢不傷.燾自斬之亦無傷.飼北園所養虎,
권령폐지운운.대평지말.시방지도장화시지.내이원회지일.홀장석도궁문.도문령참지.루불상.도자참지역무상.사북원소양호,
권력자가 폐지를 운 띄우며, 대평이 끝에는 도장을 알게 된다는 때가 시작을 하는데, 이원회하는 날마다 장석이 갑자기 궁문에 도착을 하거든 도문령을 참수할 것이니 창 촉이 아닌 상처는 부러진다는 것이다. 도자가 참수한다는 것 또한 상처가 없다고 보는 것은 북원에서 사료가 호랑이 양육하는 1등 밥이라서다.
亦不敢近.燾大生慙懼.遂感癘疾.崔,寇二人.相次發惡病.燾以過由於彼.於是誅滅二家門族.宣下國中,大弘佛法.始後不知所終.
역불감근.도대생참구.수감려질.최,구이인.상차발악병.도이과유어피.어시주멸이가문족.선하국중,대홍불법.시후불지소종.
또 가깝지 않아서 도가 태어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 한다면야 감동에 유전병이 창궐 한다는 것이다. 최와 구 2사람은 서로가 악병이 발병하여서 도가 지나친 것도 인연이다. 사살하고 멸망하는 가문 2개 종족은 선화하는 아래 국가이며 불법이 대흥하여도 처음부터 끝까지 불교 종말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議曰.曇始以大元末到海東.義凞初還關中.則留此十餘年.何東史無文.始旣恢詭不測之人.而與阿道,墨胡,難陁,年事相同.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의왈.담시이대원말도해동.의희초환관중.칙유차십여년.하동사무문.시기회궤불측지인.이여아도,묵호,난타,년사상동.삼인중의일필기변휘야.
의논이다. 위나라 담시가 대원 말년에 해동으로 넘어오고 관중 지역으로 돌아온 것은 의희 초기이니 칙서에서는 10여년간 머문 것이다. 어떤 동사에서도 글자가 없으랴. 널리 속여온 것이 아닌 측량하는 사람 입장은 원래부터 아도, 묵호, 난타 베풀다가 멈춘 것이라고 보니 사상을 갖춘 것이라는 것이다. 3명에서 1명이 의심스러울 껀데 변해진 날은 어떤 날??
讚曰.雪擁金橋凍不開.鷄林春色未全廻.可怜靑帝多才思.先著毛郞宅裏梅.
찬왈.설옹금교동불개.계림춘색미전회.가련청제다재사.선착모랑택리매.
칭찬도 해본다. 옹금교각이 얼다가 열리지 않은 것은 폭설이다. 계림에서는 봄 빛이 온전히 돌지를 않아서 임금도 많고 생각하는 재능이 푸르게만 하니 영리하다는 정도인가. 모랑택에 선착한 내부에는 매화나무 가 있어서 생긴일.
'을유문화사편 삼국유사 권 3 흥법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자 연습 (1) | 2019.08.2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