塔像 第四
탑상 제사
탑 형상 제작하기 4번째
迦葉佛宴坐石
가섭불연좌석
가섭 마등이 부처 연좌석을 흉내내다
玉龍集及慈藏傳 與諸家傳紀皆云 新羅月城東 龍宮南 有迦葉佛宴坐石 其地卽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 卽七伽藍之一也
옥룡집급자장전 여제가전기개운 신라월성동 룡궁남 유가섭불연좌석 기지즉전불시가람지허야 금황룡사지지 즉칠가람지일야
옥룡으로 자장전을 집전하였다. 집집마다 전해오는 흔적들을 몽땅 모아서 전한다. 신라에서 월성 동쪽에 룡궁이 남쪽에 있다. 때에 가섭 마등이 부처 연좌석을 흉내내었다. 땅은 앞선 불교 전례과정에서 가람이 갖는 언덕이다. 이제는 황룡사 땅으로 7가람에서 1등이라는 것이다.
按國史 眞興王卽位十四 開國三年癸酉二月 築新宮於月城東 有皇龍現其地 王疑之 改爲皇龍寺 宴坐石在佛殿後面 嘗一謁焉
안국사 진흥왕즉위십사 개국삼년계유이월 축신궁어월성동 유황룡현기지 왕의지 개위황룡사 연좌석재불전후면 상일알언
국사를 인용하였다. 진흥왕 즉위한 14년은 개정에서부터 3년은 계유년이다. 계유년 2월에 신궁을 건축하였으니 월성 동쪽으로 황룡현 땅이 있던 곳이다. 임금이 의혹을 제기하는 꼴로 황룡사로 개정하였다. 연좌석은 불전에서 뒷 문에 있어 일찍부터 알현을 해오는 곳이다.
石之高可五六尺 來圍僅三肘 幢立而平頂 眞興創寺已來 再經災火 石有拆裂處 寺僧貼鐵爲護
석지고가오육척 래위근삼주 당입이평정 진흥창사이래 재경재화 석유탁렬처 사승첩철위호
연좌석은 5 6척 정도로 높으니 팔 꿈치 3개 정도로 겨우 에워 싼다. 군장이 정하여지지 않아도 정수리를 평정해온 것은 진흥왕이 창사하다 멈춰져서 미래엔 재건 계획이 재화였다. 연좌석에는 조약돌이 많이 있었다. 사찰 중이 쇠를 더해서 보호를 하였다.
乃有讚曰 惠日沈輝不記年 唯餘宴坐石依然 桑田幾度成滄海 可惜巍然尙未遷 旣而西山大兵已後 殿塔煨燼 而此石亦夷沒 而僅與地平矣
내유찬왈 혜일침휘불기년 유여연좌석의연 상전기도성창해 가석외연상미천 기이서산대병이후 전탑외신 이차석역이몰 이근여지평의
내시들이 찬양을 하던 때다. 은혜로운 날은 침몰에도 빛이 날 것이 아니면 기록하는 년이다. 연좌석이 남아돌면 의지를 해보자. 뽕나무 밭을 제도권역화 하려는 조짐도 창해도 해냈다. 높이 솟은 돌은 아깝게 여기더라도 아닐 경우에는 옮기자는 것이다. 서산에 대병 반란을 진압한 후일이 원래부터 였다니. 전탑이 불씨와 잔불에 휩싸인 것이다. 이런 돌도 오랑캐들이 침몰하였는데 겨우 지평선에 조약화 해온 것이다.
按阿含經 迦葉佛是賢劫第三尊也 人壽二萬歲時 出現於世 據此以增減法計之 每成劫初 皆壽無量歲 漸減至壽八萬歲時 爲住劫之初 自此又百年減一歲 至壽十歲時 爲一減
안아함경 가섭불시현겁제삼존야 인수이만세시 출현어세 거차이증감법계지 매성겁초 개수무량세 점감지수팔만세시 위주겁지초 자차우백년감일세 지수십세시 위일감
아함경을 본다. 가섭 마등불은 현겁으로 보면 3번째로 귀한 존재다. 인간 수명이 2만년하는 시대에 세상으로 출현을 하는데 증감법 계략에 의지하고서 언제나 처음처럼 성겁을 하였다. 모든 수명이 무량한 세상이라 8만세상 시대에 도달할수록 점감을 쓰는데 주겁지초로 하였다. 또 100년이 빠지는 세상에서는 수명이 10세 시대에선 1감이라고 하였다.
又增至人壽八萬歲時 爲一增 如是二十減二十增 爲一住劫 此一住劫中 有千佛出世 今本師釋迦是第四尊也 四尊皆現於第九減中 自釋尊百歲壽時 至迦葉佛二萬歲時 已得二百萬餘歲 若至賢劫初第一尊拘留孫佛時 又幾萬歲也
우증지인수팔만세시 위일증 여시이십감이십증 위일주겁 차일주겁중 유천불출세 금본사석가시제사존야 사존개현어제구감중 자석존백세수시 지가섭불이만세시 이득이백만여세 약지현겁초제일존구류손불시 우기만세야
인간 수명이 8만 세상이 있어서 증가를 하면 1증가로 하였고, 이와 같은 20세대도 20증가라고 하기를 1주겁이라 하였다. 이에 1주겁에서는 부처 1천개가 출세한다고 하는 것이다. 본래 사부님 석가모니는 4번째로 귀한 몸이다. 4존은 9감소를 재현하셨는데 석가모니 존중세가 백세를 맞이하는 때에는 가섭 마등 부처는 2만 세상을 살아가는 때로 2백만년 수명을 취득하다가 사망한다. 만약에 현겁으로 보아 1존인 구류 손주가 존재해오는 부처 시대에는 1만년이 위태롭다는 것이다.
自拘留孫佛時 上至劫初無量歲壽時又幾何也 自釋尊下至于今至元十八年辛巳歲 已得二千二百三十矣
자구류손불시 상지겁초무량세수시우기하야 자석존하지우금지원십팔년신사세 이득이천이백삼십의
구류 손자 부처 시대에는 지겁이 처음으로 무량한 시대를 열어서 수명 또한 기하 적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내려오면서 지금까지 원18년으로 신사년 세상을 맞이하는데 2230년을 취득하다가 사망한다.
自拘留孫佛 歷迦葉佛時 至于今 則直幾萬世也 有本朝名士吳世文 作歷代歌 從大金貞祐七年己卯 逆數至四萬九千六百餘歲 爲盤古開闢戊寅
자구류손불 력가섭불시 지우금 칙직기만세야 유본조명사오세문 작력대가 종대금정우칠년기묘 역수지사만구천육백여세 위반고개벽무인
구류 손자 부처는 가섭 마등 부처 시대를 지내면서 오늘날을 이어오니까 법적으로 1만 세상이 위태하다. 고려 조정 명사 오세문은 역사를 대신하는 노래 제작하는데 대금정으로 7년간 기묘년까지 쫓았다. 반역해온 자 또는 년도 4만9천6백여년이니 반고에 한서가 개벽해온 것은 무인년이다.
又延禧宮錄事金希寧所撰大一歷法 自開闢上元甲子 至元豊甲子 一百九十三萬七千六百四十一歲
우연희궁녹사김희녕소찬대일력법 자개벽상원갑자 지원풍갑자 일백구십삼만칠천육백사십일세
연희궁을 녹사한 김희녕이 대일력법을 찬술하면서 개벽은 상원 갑자년에서 원풍 갑자년까지 1937641년이라 하였다.
又纂古圖云 開闢至獲麟 二百七十六萬歲 按諸經 且以迦葉佛時至于今 爲此石之壽 尙距於劫初開闢時爲兒子矣
우찬고도운 개벽지획린 이백칠십육만세 안제경 차이가섭불시지우금 위차석지수 상거어겁초개벽시위아자의
옛 고도를 편찬하였다. 개벽은 교린을 얻음이니 276만년이다. 여러 경학을 인용하여 보니까 가섭 마등 부처에서 지금까지 연좌석이 가질 수명은 추락하길 바라는 것이다. 처음 개벽할 때에는 모두가 내 자식이라는 것이다.
三家之說 尙不及玆兒石之年 其於開闢之說 疎之遠矣
삼가지설 상불급자아석지년 기어개벽지설 소지원의
3존을 설명하기는 오히려 내 자아가 돌에게 미치지 않기니 개벽을 설명하는 때에는 소통이 멀어져간다.
遼東城育王塔
요동성육왕탑
요동성 왕탑 양육하기
三寶感通錄載 高麗遼東城傍塔者 古老傳云 昔高麗聖王 按行國界次 至此城 見五色雲覆地 往尋雲中 有僧執錫而立 旣至便滅 遠看還現 傍有土塔三重 上如覆釜 不知是何 更往覓僧 唯有荒草 掘尋一丈 得杖幷履
삼보감통록재 고려요동성방탑자 고노전운 석고려성왕 안행국계차 지차성 견오색운복지 왕심운중 유승집석이입 기지변멸 원간환현 방유토탑삼중 상여복부 불지시하 경왕멱승 유유황초 굴심일장 득장병리
삼보가 주는 감동을 재능으로 통록한다. 고구려에서 요동성에 방탑을 오랜 노인이 전해준다. 예전 고구려 성왕이 국경 순찰을 하다가 요동성을 지나는데 5색 빛깔 구름이 퍼진 무지개를 땅에서 보았다. 구름 찾으러 다니시더니 땡중이 있어서 승복을 잡아야만 입장을 하였고 처음부터 멸망하는 것 같았다. 멀리 보니까 환국하라는 손짓이었다. 나라에서는 토탑을 3중 겹치게 건축하였는데 가마 엎기 기법이었다. 알지 못하는 건 뭥미? 고쳐 가다가 땡중을 찾아보는데 거친 풀밭을 기어서 다녀도 시체 찾아낼 작정을 하고도 땅을 파보아도 실현하는 것은 목발 2개를 짚고 있는 상태던 것이다.
又掘得銘 上有梵書 侍臣識之 云是佛塔 王委曲問詰
우굴득명 상유범서 시신식지 운시불탑 왕위곡문힐
도굴을 하여 명부를 얻었다. 범어로 작성해 둔 책이 있는 것이다. 시중드는 신하에게 판별을 맡겼다. 불탑이라고 판단하였다. 임금은 위나라에 곡문에게 질문을 하였다.
答曰 漢國有之 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祭天金人) 因生信 起木塔七重 後佛法始至 具知始末 今更損高 本塔朽壞 育王所統一閻浮提洲 處處立塔 不足可怪 又唐龍朔中 有事遼左 行軍薛仁貴 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山像 空曠蕭條 絶於行往 問古老
답왈 한국유지 피명포도왕(본작휴도왕제천금인) 인생신 기목탑칠중 후불법시지 구지시말 금갱손고 본탑후괴 육왕소통일염부제주 처처입탑 불족가괴 우당룡삭중 유사요좌 행군설인귀 행지수주토요고지 내견산상 공광소조 절어행왕 문고노
대답을 한다. 한국 존재하던 날 포도왕소행이다(휴도왕이라고도 하는데 제사를 주관해온 천금인이다) 믿음이 탄생하면서 목탁을 7겁 겹쳐서 제작하더니 후일에 불법이 도래하던 때에 시말을 알아두라고 하는 것이다. 손실을 수리해가니 높아만 가면서 본탑은 부패로 인해 무너지는데 임금이 염부제주 통일을 보육하면서 탑에서 노숙하는 것이다. 이상할 정도인데 멈추지를 않은 것이다. 당나라 룡삭일에는 요좌들이 간사하게 있어서 설인귀가 행군을 전담하자 수나라가 주인이던 요동 옛 땅을 토벌행하고 있음에 가깝자 배산을 보던 때에 소조야 빛내라며 빌어먹던 것이다. 행왕은 끊어지고 물어보니까 노인이 있다.
云是先代所現 便圖寫來京師(具在若函) 按西漢與三國地理志 遼東城在鴨綠之外 屬漢幽州 高麗聖王未知何君 或云東明聖帝 疑非也
운시선대소현 변도사래경사(구재약함) 안서한여삼국지리지 요동성재압록지외 속한유주 고려성왕미지하군 혹운동명성제 의비야
선대 공간에서도 나타난 현상이 경사들이 손쉽게 그림 복사를 하려는 것이다 (미술용품은 함에다 둔다)서한에서 안쪽은 3국지리지 제작할 때에 요동성을 압록 바깥으로 구역을 설정하면서 한나라 유주를 연속한 것으로 보았으니 고구려 성왕 미지하군은 동명성제를 말한다는 거로 보는데 의혹이 아닌 것이다.
東明以前漢元帝建昭二年卽位 成帝鴻嘉壬寅升遐 于時漢亦未見貝葉 何得海外陪臣 已能識梵書乎 然稱佛爲蒲圖王 似在西漢之時 西域文字或有識之者
동명이전한원제건소이년즉위 성제홍가임인승하 우시한역미견패섭 하득해외배신 이능식범서호 연칭불위포도왕 사재서한지시 서역문자혹유식지자
동명성왕에 앞서 한나라 원제가 건소 2년에 즉위하였다. 성제 홍가는 임인년에 승하하였다. 한 나라 때에는 가섭 마등이 장사하는 영토로 안보았다. 바다 멀리 영토에서 실크로드 무역을 하는 장사꾼이 되었다. 범서를 잘 알아서 자유로웠다. 그러니까 부처라 구칭하면서 포도왕으로 즉위하는데 서한 시대에서도 닮아 있어서 서역문자 도는 유식한 자라고 할 것이라면
故云梵書爾 按古傳 育王命鬼徒 每於九億人居地 立一塔 如是起八萬四千於閻浮界內 藏於巨石中 今處處有現瑞非一 蓋眞身舍利 感應難思矣
고운범서이 안고전 육왕명귀도 매어구억인거지 입일탑 여시기팔만사천어염부계내 장어거석중 금처처유현서비일 개진신사리 감응난사의
오래동안 범서를 독점해왔다. 고전을 안다는 것은 왕명으로 귀신을 보육한다는 것이니 언제나 구억인 땅에 산다. 1탑이 완공하면 8만4천이 일어나면서 염부계 내부를 거석으로 감춰두는데 오늘날에 살고 있다는 현서란 징조는 아니다. 한 가지 진신사리를 덮고 있다는 것은 감동과 응대와 곤란을 생각하기라는 것이다.
讚曰 育王寶塔遍塵寰 雨濕雲埋蘚纈斑 想像當年行路眼 幾人指點祭神墦
찬왈 육왕보탑편진환 우습운매선힐반 상상당년행로안 기인지점제신번
편찬하여 말한다. 임금님이 보육하는 보탑 편집은 진환이 하였다. 장마철에 먹구름 같은 기록은 창힐과 반고 소행이다. 당년에 상상을 하는 늙은 눈동자가 지나다니는 길은 기인이 점을 지적하여야만 제사장에 귀신이 무덤행을 한다는 것이다.
金官城婆娑石塔
금관성파사석탑
금관성에 파사석탑은
金官虎溪寺婆娑石塔者 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 許皇后名黃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甲申 自西域阿踰陁國所載來
금관호계사파사석탑자 석차읍위금관국시 세조수로왕지비 허황후명황옥 이동한건무이십사년갑신 자서역아유타국소재래
금관 호계사 속 파사석탑은 예전 마을이 금관국가 시절에 세조인 수로왕비가 허황후가 황옥화하면서 동한시대 건무 24년 갑신년에 서역국가인 아유타국에서 흘러들어왔다.
初公主承二親之命 泛海將指東 阻波神之怒 不克而還 白父王 父王命載玆塔 乃獲利涉 來泊南涯 有緋帆茜旗珠玉之美
초공주승이친지명 범해장지동 조파신지노 불극이환 백부왕 부왕명재자탑 내획이섭 래박남애 유비범천기주옥지미
처음 공주가 계승하기를 2번 친교가 운명이다 보니까 바다를 떠보니 동쪽을 지적하고 있길래 파도가 위험하게 있으니 귀신이 분노하면서 이길것이 아니면 환국하여라는 것이다. 백부던 임금은 부왕에게 명령을 내리는데 자탑을 재개하여라 하였다. 이득 실현을 위하여 건너려는 때에 남쪽 물가로 정박을 하였으니까 붉은 색 범천기가 있어서 구슬과 옥이 아름답던 것이다.
今云主浦 初解綾袴於岡上處曰綾峴 茜旗初入海涯曰旗出邊 首露王聘迎之 同御國一百五十餘年 然于時海東未有創寺奉法之事
금운주포 초해능고어강상처왈릉현 천기초입해애왈기출변 수로왕빙영지 동어국일백오십여년 연우시해동미유창사봉법지사
오늘날 주포는 처음 해석하는데 능고가 강상에 살아서 릉현이라 하였다. 천기는 처음 물가에 입해를 하면서 기출변이라 하였다. 수로왕이 영지를 방문하면서 국가를 150여년간 같아가게 하였으니 자연적으로 해동지역에서는 창사가 있지 않을 때에 봉법을 시작해온 것이다.
蓋像敎未至 而土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 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 置寺於其地 又創王后寺(在阿道訥祇王之世 法興王之前) 至今奉福焉
개상교미지 이토인불신복 고본기무창사지문 체제팔대질지왕이년임신 치사어기지 우창왕후사(재아도눌기왕지세 법흥왕지전) 지금봉복언
상형 가르침이 덮혀서 시작하지 않았고 토인이 아니면 복종도 안하고 신뢰도 안해왔으니 오래동안 본기록으로 무창사를 대신하였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신년까지 흘렀다. 그 땅에 치사한 게 왕후사를 창사하였고(아도 눌지왕 시대가 있어서 법흥왕 앞날이다) 지금에서야 복이 존재하는 것이다.
兼以鎭南倭 具見本國本記 塔方四面五層 其彫鏤甚奇 石微赤斑色 其質良脆 非此方類也 本草所云點鷄冠血爲驗者是也 金官國亦名駕洛國 具載本記
겸이진남왜 구견본국본기 탑방사면오층 기조누심기 석미적반색 기질량취 비차방류야 본초소운점계관혈위험자시야 금관국역명가락국 구재본기
남쪽 왜국 진압하기를 겸직하고 가락국 본국에 본기를 갖추면서 불탑에 방면을 5층으로 제작하였고 누진 조각품은 심할만큼 기록이다. 돌모양이 자잘한 적반색일수록 본질은 약할수록 좋은 상품이니 가야국이 아니여야 유행한다는 것이다. 가야국 본초를 보는데 점쟁이 닭이 피흘리는 모자라면 인정할 정도다. 금관국 역시 가락국이니 본기를 여기에 갖춘다.
讚曰 載厭緋帆茜旆輕 乞靈遮莫海濤驚 豈徒到岸扶黃玉 千古南倭遏怒鯨
찬왈 재염비범천패경 걸령차막해도경 기도도안부황옥 천고남왜알노경
편찬을 한다. 염을 적재한다는 것은 비범과 천패를 가볍게 하면서 소원이 신령에게 향할수록 막힐게 없으니 쓰나미도 놀랜다. 어떤 종자들이 언덕에 나와서 황옥이라 그러는가. 오래동안 남쪽 왜국에 막혔으니 고래도 분노한다는 것이다.
高麗靈塔寺
고려령탑사
고구려 영탑사에는
僧傳云 釋普德 字智法 前高麗龍岡縣人也 詳見下本傳 常居平壤城 有山方老僧 來請講經 師固辭不免 赴講涅槃經四十餘卷 罷席 至城西大寶山嵓穴下禪觀
승전운 석보덕 자지법 전고려룡강현인야 상견하본전 상거평양성 유산방노승 래청강경 사고사불면 부강열반경사십여권 파석 지성서대보산암혈하선관
해동고승전을 본다. 석가보에 있는 덕은 자지법이다. 앞날 고구려 룡강현 사람이다. 아래 본전을 통하여 자세하게 보아라. 항상 거지로 있던 평양성에는 산방마다 노승이 있어서 요청을 하면 경학 강독을 하였다. 사면이 아닐수록 고사하였는데 열반경 40여권을 보강까지도 하다가 파면보던 날에 성서 대보산 바위 구멍 아래에 선관으로 향하였다.
有神人來請 宜住此地 乃置錫杖於前 指其地曰 此下有八面七級石塔 掘之果然 因立精舍 曰靈塔寺 以居之
유신인래청 의주차지 내치석장어전 지기지왈 차하유팔면칠급석탑 굴지과연 인입정사 왈령탑사 이거지
반신 반인들도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관에 살기로 하면서 석장을 두면서 앞서가더니 땅을 지적하고 있는데 여기 아래에서는 8면 7급 석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굴착을 해보니 진짜다. 입정사로 하던 것이다. 영탑사란 그거다.
皇龍寺丈六
황룡사장육
황룡사에 있는 여른 6은
新羅第二十四眞興王卽位十四年癸酉二月 將築紫宮於龍宮南 有黃龍現其地 乃改置爲佛寺 號黃龍寺 至己丑年 周圍墻宇 至十七年 方畢 末幾 海南有一巨舫 來泊於河曲縣之絲浦(今蔚州谷浦也)
신라제이십사진흥왕즉위십사년계유이월 장축자궁어룡궁남 유황룡현기지 내개치위불사 호황룡사 지기축년 주위장우 지십칠년 방필 말기 해남유일거방 래박어하곡현지사포(금울주곡포야)
신라 제24 진흥왕이 즉위하고 14년이 흐른 계유년 2월은 자궁 건축을 룡궁남쪽에 계획을 하였다. 황룡현 땅이 있어서 고치기를 불사를 두기로 하면서 황룡사로 부른다. 을축년이 도래하자 장우 둘레치기를 끝내니 17년이 소요되었다. 방향 설정은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언제나 남쪽에서는 거방이 하나 존재하여서 하곡현에 사포에 정박을 자주 하였다(사포는 울주곡포다)
撿看有牒文云 西竺阿育王 聚黃鐵五萬七千斤 黃金三萬分 (別傳云 鐵四十萬七千斤 金一千兩 恐誤 或云三萬七千斤) 將鑄釋迦三尊像 末就
검간유첩문운 서축아육왕 취황철오만칠천근 황금삼만분 (별전운 철사십만칠천근 금일천량 공오 혹운삼만칠천근) 장주석가삼존상 말취
검간 첩문을 본다. 서축국 아육임금은 황철 5만7천근 황금 3만분을 취합하였다 (별도로 전해오는 얘기에서는 철47만7천근 금1천량은 오류를 두려워 하였고 금이 3만7천근이다) 가섭 세존 존상 3개를 주석화 하려고 하는데 끝내 이루었다는 것이다.
載舡泛海而祝曰 願到有緣國土 成丈六尊容 幷載模樣一佛二菩薩像 縣吏具狀上聞 勅使卜其縣之城東爽塏之地 創東竺寺 邀安其三尊 輸其金鐵於京師 以大建六年甲午三月(寺中記云 癸巳十月十七日)
재강범해이축왈 원도유연국토 성장육존용 병재모양일불이보살상 현이구상상문 칙사복기현지성동상개지지 창동축사 요안기삼존 수기금철어경사 이대건육년갑오삼월(사중기운 계사십월십칠일)
배를 범해에 띄우고 해신제를 지내며 국가도 인연있는 것이 소원이오니 장육존을 성취하려면 얼굴도 모양을 병행하여야 하니 1부처 2보살이라는 상형에서는 공무원이 현상하였다는 것을 상문에서는 준비완료로 이해를 하였다는 것인데 사신이 점을 쳐보니까 성동구 상개동 지역이 출현하였다. 동축사를 창건하면서 3존을 요격으로 맞이하더니 경사들이 금철로 수송을 해온지 대건 6년인 갑오년 3월까지 연속하였다 (동축사 중수기에서는 계사년 10월 17일로 하였다)
鑄成丈六尊像 一鼓而就 重三萬五千七斤 入黃金一萬一百九十八分 二菩薩入鐵一萬二千斤 黃金一萬一百三十六分 安於皇龍寺 明年像淚流至踵 沃地一尺 大王升遐之兆 或云像成在眞平之世者 謬也
주성장육존상 일고이취 중삼만오천칠근 입황금일만일백구십팔분 이보살입철일만이천근 황금일만일백삼십육분 안어황룡사 명년상누유지종 옥지일척 대왕승하지조 혹운상성재진평지세자 류야
6존상을 성장한 모습으로 주조해보니 존상이 뜨겁다. 3만 5천 7근을 무겁게 해서 그런지 황금 1만 1백 98분을 도금하고 보살 2명은 철 1만2천근을 주입을 하고 황금 1만1백36분을 황룡사에다 투자한 것이다. 명년 꼴이 주조만 하다 보낸다. 1척 정도 땅에 수로를 뚫으니 대왕이 하직할 조짐이 있거나 모형이 진평대왕에서 세자가 눈에 보인다는 속설은 오류다.
別本云 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生佛後一百年間 恨不得供養眞身 斂化金鐵若干斤 三度鑄成無功 時王之太子獨不預斯事 王使詰之
별본운 아육왕재서축대향화국 생불후일백년간 한불득공양진신 렴화금철약간근 삼도주성무공 시왕지태자독불예사사 왕사힐지
동축사를 황룡사와 이별해둔 본기다. 아육왕은 서축국에서 대향화국에 있다. 100년은 부처도 늦게 탄생한다는 것이다. 원한이 쌓여지지 않으면 진신에 공양을 해 온 것이니 금철로 변화를 수렴해온 것이다. 간근으로 해온 것이라면 제도권에서 3회를 주조하여도 공로가 없으니 때에 임금에 태자가 혼자서 예사롭게 해온 것이 아니었으니 임금 역시 사신에게 힐 하였다.
太子奏云 獨力非功 會知不就 王然之 乃載舡泛海 南閻浮提十六大國 五百中國 十千小國 八萬聚落 靡不周旋 皆鑄不成 最後到新羅國 眞興王鑄之於文仍林 像成 相好畢備 阿育此翻無憂 後大德慈藏西學到五臺山 感文殊現身授訣
태자주운 독력비공 회지불취 왕연지 내재강범해 남염부제십육대국 오백중국 십천소국 팔만취락 미불주선 개주불성 최후도신라국 진흥왕주지어문잉림 상성 상호필비 아육차번무우 후대덕자장서학도오대산 감문수현신수결
태자 역시 주문을 한다. 혼자 힘쓰면 공로가 아니다. 모임 역시 이루지 않음을 안다. 그러려니 한다는 임금은 화물을 범해에서 산적을 할 때 남염부는 16국에서 대국이니 5백 중국에게는 1천여개 소국이 10국 있으니 만국이다. 만국이 8회 진행하면 추락이요. 쓰러질 게 아니면 선을 본다. 모든 주조물도 완성하지 않아서 최후에 신라국을 속이려고 하니 진흥왕이 주조물에 새길 문자는 계림에서 건진다. 본 뜨기를 마치니 좋다는 듯이 경축도 마치니 아육은 번뇌가 없어서 근심이라고 하자 후일에 대덕이 자장에게 있는데 서학이 오대산에 뭉쳐있어서 문수보살이 몸으로 재현하여 결정을 수여하였다는 데에 감동을 먹었다.
仍囑云 汝國皇龍寺 乃釋迦與迦葉佛講演之地 宴坐石猶在 故天竺無憂王 聚黃鐵若干斤泛海 歷一千三百餘年 然後乃到而國 成安其寺 蓋威緣使然也(與別記所載符同) 像成後 東竺寺三尊亦移安寺中
잉촉운 여국황룡사 내석가여가섭불강연지지 연좌석유재 고천축무우왕 취황철약간근범해 력일천삼백여년 연후내도이국 성안기사 개위연사연야(여별기소재부동) 상성후 동축사삼존역이안사중
촉탁을 맡았다. 너네 나라에 황룡사는 석가모니가 가섭마등에게 불교강연을 맡기는 땅이라 좌석 있기는 잔치밭이니 오랜 천축국에 무우왕은 황철로써 방패와 도끼를 제작하고 범해로 띄우니 1천3백여년이 흐른다. 흘러가다가 여러 국가를 상대로 속여오니 사찰도 완성하였다. 사신이 억지인연을 덮으려 하였다 (별기에서 등장하는 부신은 같다) 본 뜨기를 마치고 보니 동쪽 축국에 있는 사찰 3존은 역시나 이사를 하였는데 안사다.
寺記云 眞平五(六)年甲辰 金堂造成 善德王代 寺初主眞骨歡喜師 第二主慈藏國統 次國統惠訓
次廂律師云 今兵火已來 大像與二菩薩皆融沒 而小釋迦猶存焉
사기운 진평오(육)년갑신 금당조성 선덕왕대 사초주진골환희사 제이주자장국통 차국통혜훈
차상율사운 금병화이래 대상여이보살개융몰 이소석가유존언
신라본기를 본다. 진평왕에서 갑신년은 5년 내지 6년이다. 불당 조성을 금으로 마쳤다. 선덕왕 시대에는 사찰에 처음 진골인 희사가 주지로 있었다. 다음 주지는 자장이라는 국통이다. 다음 국통이 혜훈이다.
다음 율사로 상이 전한다. 전쟁은 멈추지만 진행한다. 큰 형상을 보살 2명에게 내려주다간 전부가 융합하다가 침몰한다. 석가에게 있을 유언은 적지는 않다.
讚曰 塵方何處匪眞鄕 香火因緣最我邦 不是育王難下手 月城來訪舊行藏
찬왈 진방하처비진향 향화인연최아방 불시육왕난하수 월성래방구행장
편찬하였다. 진방면에 살고 있는 거주자는 진짜 시골인데 화재로 인하여 아방에서는 지독한 인연이다. 6왕이 인정하지 않으면 아래로 갈수록 어려워지니 월성에 방구행장을 불러라.
皇龍寺九層塔
황룡사구층탑
황룡사를 재건하는 9층 탑돌이
新羅第二十七善德王卽位五年 貞觀十年丙申 慈藏法師西學 乃於五臺感文殊授法(詳見本傳) 文殊又云 汝國王是天竺刹利種王 預受佛記
신라제이십칠선덕왕즉위오년 정관십년병신 자장법사서학 내어오대감문수수법(상견본전) 문수우운 여국왕시천축찰이종왕 예수불기
신라 제27선덕왕은 즉위하였다. 5년은 정관 10년으로 병신이다. 자장법사가 서학을 하시고 문수보살에서 수법으로 감통을 해온 오대다 (본전을 상세히 보아라) 문수 기록에서는 국왕이 천축국과의 교역에서 이득을 챙기려고 하였다. 먼저 받아 본 수기로 수여하였다.
故別有因緣 不同東夷共工之族 然以山川崎嶮故 人性麤悖 多信邪見 而時或天神降禍 然有多聞比丘 在於國中 是以君臣安泰 萬庶和平矣 言已不現 藏知是大聖變化 泣血而退 經由中國大和池邊 忽有神人出問 胡爲至此
고별유인연 불동동이공공지족 연이산천기험고 인성추패 다신사견 이시혹천신강화 연유다문비구 재어국중 시이군신안태 만서화평의 언이불현 장지시대성변화 읍혈이퇴 경유중국대화지변 홀유신인출문 호위지차
오랜 이별은 인연이 존재하여서 동이족이 같아지지 않으니까 공업으로써 겨레를 함께 하려는데 산천이 기험하던 것이다. 오래동안 인간 성품이 도리에서 추락하였으니 사견들이 많이 믿는다. 미혹한 때에는 천신들이 재화를 내린다. 요런 다문이 있으면 언덕을 모아라. 언덕은 국가에도 있다. 임금이 신하를 크게 하려고 하시니까 1만이 화평을 살찌운다. 언어도 멈추면 재현하지 않아서 숨겨진 지식을 알아차릴 것 같다면 대성인도 변화한다. 피 눈물은 퇴각하여라. 중화인민국을 경유지로 하다가는 연못 주변이 커지려고 하는거 같아서 갑자기 신인이 있어서 출문을 하거든 호수라고 하여라.
藏答曰 求菩提故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隣寇縱橫 是爲民梗
장답왈 구보제고 신인예배 우문 여국유하유난 장왈아국북연말갈 남접왜인 려제이국 질범봉수 린구종횡 시위민경
장답이 말한다. 보제를 구하여라. 오래동안 신인은 예배를 하였다. 또 다른 질문은 너네 국가에 있는 어떤 정체현상이 어렵냐? 장이 대답하는데 신라국에 북쪽은 말갈과 연결하고 남쪽은 왜인이 접속하고 고구려와 백제 2개국가는 수비를 봉인하기엔 지나칠수록 침범을 하니 이웃 도둑 국가들이 늘어났다. 민경이라고 쓴다.
神人云 今汝國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藏問歸鄕將何爲利益乎
신인운 금여국이여위왕 유덕이무위 고인국모지 의속귀본국 장문귀향장하위이익호
신인이 운을 뗀다. 인제 너네 나라를 여자를 임금삼아야만 덕은 있으니 위엄은 없어진다. 오래동안 이웃 국가를 꾀내어서 본국으로 신속히 귀국하여라. 장 역시 귀국길을 여쭤보니까 시골에서는 장차 이득이 생겨도 장에게는 안주려고 하였다.
神曰 皇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於京畿南岸 置一精廬 共資予福 矛亦報之德矣
신왈 황룡사호법룡 시오장자 수범왕지명 래호시사 귀본국 성구층탑어사중 린국강복 구한래공 왕조영안의 건탑지후 설팔관회 사죄인 칙외적불능위해 갱위아어경기남안 치일정려 공자여복 모역보지덕의
신이 말한다. 황룡사에 호법룡은 내게서 장자다. 범왕에 명령을 받아서 호법할 목적으로 본사에 오니 본국에 귀국하여라. 구층탑은 황룡사에 완성하였다. 이웃 국가들이 복수를 내릴 것이다. 한 족이 9번을 조공하는데 임금에서 조영이가 안전하다. 탑을 건설한 후에는 팔관회를 설명하여라. 사람에 죄를 용서하여라. 바깥 도둑이 잘하지 않음을 본떠라. 해침은 다시 경기남부 안성에 만족하여라. 일정려를 두고서 모아둔 재물로 복을 내려가니까 삼지창 역시 덕을 보복한다.
言已 遂奉玉而獻之 忽隱不現 (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 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언이 수봉옥이헌지 홀은불현 (사중기운 어종남산원향선사처 수건탑인유) 정관십칠년계묘십육일 장당제소사경상가사폐백 이환국 이건탑지사문어상 선덕왕의어군신
말이 끊기고 옥을 받들어 납품을 가는데 갑자기 거주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황룡사 중수기에서는 남산 끝자락에 원향선사가 살고 있다고 하니 탑 건설을 수행하는 인연으로 존재하였다고 한다) 정관 17년은 계묘년이다. 16일에 당나라 임금이 가사폐백을 본 뜨고 옷을 주려고 주변국을 방문하는데 탑을 건설하는 과정에 사문이 하는 얘기를 위에서 듣던 것이다. 선덕왕은 군신을 불러모아 의논을 한다.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一作龍樹)幹蠱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皆隱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군신왈 청공장어백제 연후방가 내이보백청어백제 장명아비지 수명이래 경영목석 이간룡춘(일작룡수)간고솔소장이백인 초입찰주지일 장몽본국백제멸망지상 장내심의정수 홀대지진동 회명지중 유일노승일장사 자금전문출 내입기주 승여장사개은불현 장어시개회 필성기탑
군신이 말한다. 백제 공장에 요청하자. 방향설정은 후일에 하자. 보물과 비단을 백제에 요청하던 날에 대장장이 아비를 알아서 명령을 수행하여라 하니까 오는 것이다. 목석으로 상품생산을 잘 한다. 이간 용춘은 (룡수 라고도 하는데) 간급에서 고효율로 소장2백인을 부려쓰는 자다. 사찰과 당간지주를 제작하는 날 신라국이 백제국에 멸망하는 형상을 꿈 꿔서 작업하는 공정이 정해지지 않았다. 대지가 진동을 하더니 어둠이 깊던 날에 늙은 노인과 장사 1명이 있어서 금전문을 출출하게 되었고 당간지주 제작을 마칠 때에는 늙은 노인승과 장사가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으니 대장장이가 개회를 인정하여서 탑 제작을 마쳤다는 것이다.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臺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幷通度寺戒壇 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大和寺在阿曲縣南 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靈蔭乎 後高麗王將謀伐羅
찰주기운 철반이상고사십이척 이하일백팔십삼척 자장이오대소수사리백입 분안어주중 병통도사계단 급대화사탑 이부지룡지청(대화사재아곡현남 금울주 역장사소창야) 수탑지후 천지개태 삼한위일 기비탑지령음호 후고려왕장모벌라
사찰 당간지주 건설 기록을 본다. 철반으로 높이 42척을 제작하였고 아래로는 183척 길이로 잡았다. 자장법사가 오대산에서 사리 백립 제작을 수행하는데 안전을 나누어 당간지주를 제작하였다. 통도사에 계단 제작을 함께하니 대화사에 있는 탑 역시 부지룡에게 요청하였다 (대화사 소재지는 아곡현 남쪽으로 울주다. 또 장사 출생지 이기도 하다) 탑을 나무로 제작한 후에는 천지가 해태시대로 개벽을 하는데 개벽 현상이 3한이라고 한번 그랬다. 탑이 아니면 신령 음복이 아니다. 후일에 고려 왕건이 상시적으로 라국 정벌을 꾀한다.
乃曰 新羅有三寶 不可犯也 何謂也 皇龍丈六 幷九層塔 與眞平王天賜玉帶 遂寢其謀 周有九鼎 楚人不敢北窺 此之類也
내왈 신라유삼보 불가범야 하위야 황룡장육 병구층탑 여진평왕천사옥대 수침기모 주유구정 초인불감북규 차지류야
지난번에 신라에는 3보가 있어서 불가침이 있다는 것인데 뭔 일인고? 황룡사에는 장육이 9층탑과 함께 하니 진평왕이 천사인 옥대와 더붙어서 잠들때마다 꾀를 내었다. 주나라에 아방궁도 솥이 9개가 있으니 초나라 사람이 아니라면 북쪽을 엿보던 것이 이번에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讚曰 鬼拱神扶壓帝京 輝煌金碧動飛甍 登臨何啻九韓伏 始覺乾坤特地平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찬왈 귀공신부압제경 휘황금벽동비맹 등림하시구한복 시각건곤특지평 우해동명현안홍찬동도성입기운 신라제이십칠대 여왕위주 수유도무위 구한침노
편찬을 하였다. 귀공과 신부가 제경을 압박하고 황금이 휘날리려면 벽동이 날개짓이 싹터야 하는데 등림이 어떻게 못 할 뿐 9한이 복수한다. 처음 건곤이 특이하게 지평을 깨달자 또 해동에 이름으로 현안이 홍찬한 동도성입기를 보는데 신라 제27대왕은 여왕이 주인이다. 도는 있어도 위엄이 없으니 9한이 복수를 하니 노동자를 침략하는 것이다.
若龍宮南皇龍寺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약용궁남황룡사건구층탑 칙린국지재가진 제일층일본 제이층중화 제삼층오월 제사층탁라 제오층응유 제육층말갈 제칠층단국 제팔층여적 제구층예맥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건축할 것이라면 이웃 국가가 가질 재앙에서 해방을 맞이할 것이라는데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인 것입니다.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眞興王癸酉創寺後 善德王代 貞觀十九年乙巳 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卽位七年 聖曆元年戊戌六月 霹靂(寺中古記云 聖德王代 誤也 聖德王代無戊戌) 第三十三聖德王代庚申歲 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 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우안국사급사중고기 진흥왕계유창사후 선덕왕대 정관십구년을사 탑초성 삼십이효소왕즉위칠년 성력원년무술육월 벽력(사중고기운 성덕왕대 오야 성덕왕대무무술) 제삼십삼성덕왕대경신세 중성 사십팔경문왕대무자육월 제이벽력 동대제삼중수
국사에서 사찰 중고기를 인용하였다. 진흥왕이 계유년에 창사한 후년에는 선덕왕 시대가 정관19년인 을사년에 탑을 처음 완성하고서 32대 효소왕이 즉위한 7년이다. 성력 원년인 무술년 6월에 벼락 맞았다. (사찰 중고기에서는 성덕왕대는 오류이며 성덕왕대에서는 무술년이 없다) 제 33대 성덕왕은 경신시대를 대신하였다. 경신년대가 무겁게 완성하였다. 48대 경문왕시대에서 무자년 6월에 2차 벼락을 맞이하였고 차례대로 3번째 중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至本朝光宗卽位五年癸丑十月 第三霹靂 現(顯)宗十三年辛酉 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 第四霹靂 又文宗甲辰年 第五重成
지본조광종즉위오년계축십월 제삼벽력 현(현)종십삼년신유 제사중성 우정종이년을해 제사벽력 우문종갑진년 제오중성
고려 정권 광종이 즉위한 5년은 계축년 10월에 3차 벼락을 맞았으니 13년 신유년에 고칠 조짐이 생겨났다. 4번을 힘겹게 수리를 완성하였다. 또 고려 정권 정종 2년 을해년에 4차 벼락을 맞았으니 고려 문종 갑진년에 5차 수리를 하는 것이다.
又憲(獻)宗末年乙亥 第五霹靂 肅宗丙子 第六重成 又高宗十六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寺丈六殿宇皆災
우헌(헌)종말년을해 제오벽력 숙종병자 제육중성 우고종십육년무술동월 서산병화 탑사장육전우개재
고려 헌종 말년 을해년에 5차 벼락을 맞아서 숙종임금님 병자년에 6차 수리를 하였는데 고려 고종 16년 무술년 겨울에 서산에 전쟁으로 인하여 탑과 사찰 장육 전우 모두 재앙이 되었다.
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鐘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
황룡사에 종소리 분황사에 약가루 봉덕사로 울린다
新羅第三十五 景德大王 以天寶十三甲午 鑄皇龍寺鐘 長一丈三寸 厚九寸 入重四十九萬七千五百八十一斤 施主孝貞伊王三毛夫人 匠人里上宅下典 肅宗朝 重成新鐘 長六尺八寸
신라제삼십오 경덕대왕 이천보십삼갑오 주황룡사종 장일장삼촌 후구촌 입중사십구만칠천오백팔십일근 시주효정이왕삼모부인 장인리상택하전 숙종조 중성신종 장육척팔촌
신라 제 35 경덕대왕은 즉위하였다 천보 13년은 갑오년이다. 황룡사 종을 주조하더니 길이가 1장 3척이다. 9촌 사이가 두꺼워졌다. 49만1천580근을 사용하여서 중건하였다. 효정이가 시주하였으니 이번 왕은 삼모부 사람이다. 기술자는 상택하 사람이다. 고려 숙종 조정에서 조정 법을 선택하셨으니 새로운 종을 완성하여라는 것인데 길이가 6척에 8촌 정도다.
又明年乙未 鑄芬皇藥師銅像 重三十萬六千七百斤 匠人本彼部强古乃未 又捨黃銅一十二萬斤 爲先考聖德王 欲鑄巨鐘一口 未就而崩 其子惠恭大王乾運 以大曆庚戌十二月 命有司鳩工徒 乃克成之 安於奉德寺 寺乃孝成王開元二十六年戊寅 爲先考聖德大王奉福所創也
우명년을미 주분황약사동상 중삼십만육천칠백근 장인본피부강고내미 우사황동일십이만근 위선고성덕왕 욕주거종일구 미취이붕 기자혜공대왕건운 이대력경술십이월 명유사구공도 내극성지 안어봉덕사 사내효성왕개원이십육년무인 위선고성덕대왕봉복소창야
또 이번년은 을미년이다. 분황사에 약사 동상을 주조하였는데 30만67백근을 쓴다. 기술자는 본피부 사람이고 강고내는 아니다. 또 황동 12만근을 버리는데 오랜 성덕왕 때에 시작하였다. 큰 종일수록 입 하나로 주조하려고 하였으니 아직 이루지 않았으나 붕괴되었다. 그 아들 혜공대왕이 하늘에 운을 맡겨서 완성하였으니 대력은 경술년 12월이다. 명령으로 공도에 유사장인을 모았으니 해냈다는 것인데 봉덕사에 안치하였다. 봉덕사 안에는 효성왕 개원한 26년 무인년이니 성덕대왕이 봉인하신 복이 창복한 것이다.
故鐘銘曰 聖德大王神鐘之銘(聖德乃景德之考 典光大王也 鐘本景德爲先考所施之金 故稱云聖德鐘爾) 朝散大夫前太子司議郞翰林郞金弼粤(奚)奉敎撰鐘銘 文煩不錄
고종명왈 성덕대왕신종지명(성덕내경덕지고 전광대왕야 종본경덕위선고소시지금 고칭운성덕종이) 조산대부전태자사의랑한림랑금필월(해)봉교찬종명 문번불녹
종 표면에 새겨보기를 성덕대왕과 함께한 귀신이 종을 함께 하였다고 한다 (성덕은 경덕을 보면은 이다 전광대왕이다. 종이란 본래 경덕인데 앞날을 베풀기 하려는 자가 금을 구칭하기를 성덕종은 너 라고 하였다) 조산대부는 앞날에 태자인 사의랑으로 한림을 지낸 랑금필월이다. 종명을 받들으며 편찬을 가르쳤으니 조각하기가 괴롭지 않았으니 녹이 불어난 것이다.
靈妙寺丈六
령묘사장육
영묘사에 있는 6어른
善德王創寺塑像因緣 具載良志法師傳 景德王卽位二十三年 丈六改金 租二萬三千七百碩(良志傳 作像之初成之費 今兩存之)
선덕왕창사소상인연 구재양지법사전 경덕왕즉위이십삼년 장육개금 조이만삼천칠백석(양지전 작상지초성지비 금량존지)
선덕왕이 창사를 상형한 인연이 있어서 양지법사가 전해주는 시설을 재기한다. 경덕왕이 즉위하고서 23년에 어른 6 상형 모두를 금으로 하였으니 2만3천7백석을 세금으로 부과하였다 (양지전에서는 상형을 하려는 처음엔 완성할 목적으로 소비를 하였으니 인제는 령묘사와 양지법사가 함께 존재한다)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불산 4개에는 불산을 캐내니까 불산이 1만개
竹嶺東百許里 有山屹然高峙 眞平王九年甲申 忽有一大石 四面方丈 彫四方如來 皆以紅紗護之 自天墜其山頂 王聞之命駕瞻敬 遂創寺嵓側 額曰大乘寺 請比丘亡名誦蓮經者主寺 洒掃供石 香火不廢 號曰亦德山 或曰四佛山
죽령동백허리 유산흘연고치 진평왕구년갑신 홀유일대석 사면방장 조사방여래 개이홍사호지 자천추기산정 왕문지명가첨경 수창사암측 액왈대승사 청비구망명송련경자주사 쇄소공석 향화불폐 호왈역덕산 혹왈사불산
죽령 동쪽에는 허리가 100개다. 산이 우뚝 솟을 경우에 우뚝 솟아 있는 꼴이다. 진평왕 9년 갑신년에 갑자기 일석이 커지더니 4면에서 방장을 하였고 방장이 여래를 비춘다. 홍사단이 보호를 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산정은 왕이 듣고 첨경하는데 말타기로 한 것이다. 수창사에 바위면은 대승사로 편액하였고 요청을 따라해보니 언덕이 망하여 이름이 연경자라면 주사를 외워라. 돌을 쇄소하고 말을 한다면 향기와 불은 패배하지를 않으니 역덕산으로 불리기도 하고 사불산 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比丘卒旣葬 塚上生蓮 又景德王遊幸栢栗寺 至山下聞地中有唱佛聲 命掘之 得大石 四面刻四方佛 因創寺 以掘佛爲號 今訛云掘石 王又聞唐代宗皇帝優崇釋氏 命工作五色氍毹
비구졸기장 총상생련 우경덕왕유행백율사 지산하문지중유창불성 명굴지 득대석 사면각사방불 인창사 이굴불위호 금와운굴석 왕우문당대종황제우숭석씨 명공작오색구유
비구니가 사병 장례를 치른다. 무덤 위에는 연밥이 출생한다. 또 경덕왕이 백율사를 산행하여 놀아나는데 산 아래 문지는 불성을 창가하고 있었으니 명령을 내린 것이 땅 파기다. 대석을 득템하시고 사면에 새기길 방불이라 새겼다. 이어서 사찰이 창건하고 땅파는 부처님이라 불리었으니 굴석은 오늘날 와전되었다. 임금은 또 듣기를 당나라 대종황제인 우승석씨는 대장장이에게 오색구유를 제작하라고 하였다.
又彫沈檀木與明珠美玉 爲假山 高丈餘 置氍毹之上 山有巉嵓怪石澗穴 區隔每一區內 有歌舞伎樂列國山川之狀 微風入戶 蜂蝶翶翔 鷰雀飛舞 隱約視之 莫辨眞假 中安萬佛 大者逾方寸 小者八九分 其頭或巨黍者
우조심단목여명주미옥 위가산 고장여 치구유지상 산유참암괴석간혈 구격매일구내 유가무기락례국산천지상 미풍입호 봉접고상 연작비무 은약시지 막변진가 중안만불 대자유방촌 소자팔구분 기두혹거서자
심약이 제작한 단목으로 명주를 제작하니까 옥빛이 아름다워서 가산이라고 하였더니 돈이 된다. 구유 위에다 놓는다. 산에는 참암과 괴석과 간혈이 있어서 구역 나누기는 언제나 한 구역씩 하였다. 또 가무를 하려니 기락이 필요하여서 나라에 산과 하천을 본 뜨고 미풍이면 지게 짊어지게 하였으니 나비와 벌이 날아돈다. 제비와 참새가 날아 춤춘다. 은둔과의 약속을 본다. 진가에서 변화가 없다. 만불이 편안해 하다가 큰 넘은 방촌을 넘나들더니 작은 넘은 8에서 9번을 나누고 있어서 우두머리 이거나 서자 입장에서는 컸다.
或半菽者 螺䯻白毛 眉目的력 相互悉備 只可髣髴 莫得而詳 因號萬佛山 更鏤金玉爲流蘇幡蓋菴羅薝葍花果莊嚴 百步樓閣 臺殿堂榭 都大雖微 勢皆活動
혹반숙자 나고백모 미목적력 상호실비 지가방불 막득이상 인호만불산 갱루금옥위유소번개암라담복화과장엄 백보누각 대전당사 도대수미 세개활동
반숙자라는 것은 소라껍질이 흰 털이다. 눈덩이가 빨갈수록 힘이라서 상호들이 모두 갖춘다. 그러니 방불이라 하였다. 실현할 게 없어도 자세하였고 만불산에 기원을 둔다. 금옥으로 고쳐새기니 암라를 덮는 표식지에 풀때기가 흐르니 담복화과 무리들이 장엄히 존재한다. 백걸음을 가면 다락과 문설주가 있어서 대전당에서 정사보기는 도읍 규모가 클수록 작다. 세력자들이 화살로 활동한다.
前有旋遶比丘像千餘軀 下列紫金鐘三簴 皆有閣有蒲牢鯨魚爲撞 有風而鐘鳴 則旋遶僧皆仆拜頭至地 隱隱有梵音 盖關捩在乎鐘也
전유선요비구상천여구 하렬자금종삼거 개유각유포뇌경어위당 유풍이종명 칙선요승개부배두지지 은은유범음 개관렬재호종야
앞 선 날 비구가 1천개 몸을 선요로 본뜨고 있으니 아래로 자금빛 종 3거를 벌릴려고 하였다. 문설주기 있고 고래고기 포경행위가 있어서 당 행위가 존재하였다. 바람이 불면 종이 울어대고 모든 스님이 선요를 엎드리고 머리로 절한다. 땅에는 범음이 숨어 있다. 개관을 끌어들이고 있기는 종이다.
雖號萬佛 其實不可勝記 旣成 遣使獻之 代宗見之
수호만불 기실불가승기 기성 견사헌지 대종견지
자주 만불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아닌 것만 이겼다고 기록할 정도니 원래부터 이룬 것인가. 사신을 봉헌하려고 보내니까 대종을 본다.
嘆曰 新羅之巧天造 非[人]巧也 乃以九光扇 加置嵓岫間 因謂之佛光 四月八日 詔兩街僧徒 於內道場 禮萬佛山 命三藏不空 念讚密部眞詮千遍 以慶之 觀者皆嘆伏其巧
탄왈 신라지교천조 비[인]교야 내이구광선 가치암수간 인위지불광 사월팔일 조량가승도 어내도장 예만불산 명삼장불공 념찬밀부진전천편 이경지 관자개탄복기교
한숨을 쉰다. 신라국에 기교는 천조로 하기는 기교가 아니다. 광선이 9번 내릴 때에는 암수 사이에는 가치가 있어서 불광이 자리를 잡았다. 4월 8일은 팔관승지회에 고하여라. 도장에서는 만불산에 경의를 표하고 명령을 내리는데 3장은 줄어들지 말라는 것이다. 념이 밀부전을 편찬하면서 천편을 설명하였고 이러한 경사에서는 보는자들이 기교로 엎드리고 숨는 것이다.
讚曰 天粧滿月四方裁 地湧明毫一夜開 妙手更煩彫萬佛 眞風要使遍三才
찬왈 천장만월사방재 지용명호일야개 묘수갱번조만불 진풍요사편삼재
편찬을 하였다. 천장을 채우는 만월은 사방을 다림질하고 재용이가 밝은 것은 글쓰기하는데 밤에 해서다. 구묘한 손놀림은 다시 만불새기기에 번거로워하는데 진짜 바람을 구하여야 사신이 갖는 3가지 재능을 골고루 한다.
生義寺石彌勒
생의사석미륵
의사석 미륵이 탄생하였다.
善德王時 釋生義常住道中寺 夢有僧引上南山而行 令結草爲標 至山之南洞
선덕왕시 석생의상주도중사 몽유승인상남산이행 령결초위표 지산지남동
선덕왕 때에 의상대사 주도로 사찰 중수하기를 석생하였다. 꿈에는 스님이 남산을 옮기셨다는데 풀밭으로 결정하고서 표식지를 꽂으셨으니 남산이 남동인 것이다.
謂曰 我埋此處 請師出安嶺上 旣覺 與友人尋所標 至其洞掘地 有石彌勒出 置於三花嶺上 善德王十三年甲辰歲 創寺而居 後名生義寺
위왈 아매차처 청사출안령상 기각 여우인심소표 지기동굴지 유석미륵출 치어삼화령상 선덕왕십삼년갑진세 창사이거 후명생의사
부연 설명이다. 내 매장지에서 살기는 스승님 요청으로 안령위에서 출발한다. 뿔은 존재하였다. 우인들이 찾던 표식지를 주니까 동네에 굴지를 요청하였으니 미륵돌이 출현한 것이다. 꽃 3가지를 위에다 놓으니 선덕왕 13년 갑진년 일이다. 사찰 창건하는 중에 있어보니 후일에 이름이 의사다.
(今訛言性義寺 忠談師每歲重三重九 烹茶獻供者 是此尊也)
(금와언성의사 충담사매세중삼중구 팽차헌공자 시차존야)
(오늘날 언어로 의사를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충담사가 언제나 중3중9를 놀려대서 생긴 것이다. 차를 바칠 때 삶아서 바칠 것이라면 존재하는 이유가 있음이다)
興輪寺壁畫普賢
흥륜사벽화보현
흥륜사에 벽화이름이 보현
第五十四景明王時 興輪寺南門 及左右廊廡災焚 未修 靖和弘繼二僧 募緣將修
제오십사경명왕시 흥륜사남문 급좌우랑무재분 미수 정화홍계이승 모연장수
제54 경명왕 임금 시대에 흥륜사 남쪽문에서는 좌우 시랑들이 미치더니 집과 재앙거리를 불태우려는 것이다. 수습이 안된다. 정화와 홍계 스님 2명이 인연있는 장수들을 긁어모은다.
貞明七年辛巳五月十五日 帝釋降于寺之左經樓 留旬日 殿塔及草樹土石 皆發異香 五雲覆寺 南池魚龍喜躍跳擲 國人聚觀嘆未曾有 玉帛梁稻施積丘山 工匠自來 不日成之 工旣畢 天帝將還
정명칠년신사오월십오일 제석강우사지좌경누 유순일 전탑급초수토석 개발이향 오운복사 남지어룡희약도척 국인취관탄미증유 옥백양도시적구산 공장자래 불일성지 공기필 천제장환
정명 7년은 신사년이다. 5월 15일에 제석천에서 내려온다는 사찰에 왼쪽을 포갠다. 열흘을 정체하였다. 전탑이 풀 나무 흙 돌로 쌓였다. 모두 발사하여도 향기만이 각각 존재하였다. 운복사 5개는 남쪽 연못에 기쁜 어룡이 뛰도록 도척하는 것이니 나라 사람들이 모이면 일찍이 관람을 하는데 탄식할 때마다 미증유를 흘렸다. 옥백과 양도는 베풀때가 오면 구산에 적치하는데 기술자를 소환하여야 하지만 일성지가 아닌 것이다. 기술은 이미 해냈다는데 천제가 제석천으로 돌아오려나 보다.
二僧白曰 天若欲還宮 請圖寫聖容 至誠供養 以報天恩 亦乃因玆留影 永鎭下方焉
이승백왈 천약욕환궁 청도사성용 지성공양 이보천은 역내인자유영 영진하방언
정화 홍계에서 백이 말하기를 천제가 환궁할 것 같다면 도사와 성용들이 요청하는데 지독한 공양이여도 하늘 은혜에 보은하기까지가 또한 그림자에 머무는 것 같아서 후일날 영을 진압하여야 합니다.
帝曰 我之願力 不如彼普賢菩薩 遍垂玄化 畫此菩薩像 虔設供養而不廢宜矣 二僧奉敎 敬畫普賢菩薩於壁間 至今猶存其像
제왈 아지원력 불여피보현보살 편수현화 화차보살상 건설공양이불폐의의 이승봉교 경화보현보살어벽간 지금유존기상
임금이 말한다. 내게 있는 원력은 보현보살이 따르지 않아서 온 몸이 검정색이다. 그림은 보살 형상이다. 정성껏 공양을 설명하여도 폐지하기는 따라붙는다. 정화와 홍계는 가르침을 받아라. 보현보살 속 틈에는 그림을 공경하고 있어서 지금도 본 뜬 형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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