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권제십칠
고구려본기제오[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三國史記卷第十七
高句麗本紀第五[東川王 中川王 西川王 烽上王 美川王]
삼국사기 17권
고구려 본기 5번째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마천왕이다.
동천왕[혹운동양] 휘우위거 소명교체 산상왕지자 모주통촌인 입위산상소후 사실기족성 전왕십칠년 입위태자 지시사위 왕성관인 왕후욕시왕심 후왕출유 사인절왕로마렵 왕환왈 마무렵가연 우령시자진사시 양복갱어왕의 역불노
東川王[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彘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鬣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동천왕은 (동양으로도 존재하는데) 우위거다. 교체를 자주 사용하는데 산상왕에 자식이다. 엄마가 주통촌 사람이라서 산상왕 소후로 입장하였다. 역사가 종족과 성씨를 분실하였다. 과거왕 17년에 태자로 입장하고 왕위를 상속하니까 임금에 성질이 관대하고 인애하셔서 왕후는 틈만 나면 왕심을 시험하였다. 후왕이 유행을 하거든 사신을 시켜서 왕로와 마렵을 끊어낼 참이니 귀가하고 한다는 소리가 마렵이 끊어지면 뭘 하고 놀아야 하는데요. 또 수행인들이 밥시간이 되니까 갱에서 왕의를 양복으로 바꾸더니 분노로 채워져도 터트릴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년 춘이월 왕여졸본 사시조묘 대사 삼월 봉우씨위왕태후
사년 추칠월 국상고우루졸 이우태명림어수위국상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大赦 三月 封于氏爲王太后
四年 秋七月 國相高優婁卒 以于台明臨於漱爲國相
동천왕 2년 봄 2월이다. 임금이 졸본처럼 조묘에게 제사올리기를 시작하였으니 죄인들 사면도 하였다. 3월에 봉우씨를 왕태후로 봉인하였다.
동천왕 4년 가을 7월이다. 국상이던 고우루가 사망하였다. 우태이던 명림어수를 국상으로 하였다.
팔년 위견사화친 추구월 태후우씨훙 태후임종유언왈 첩실행 장하면목견국양어지하 약군신불인제어구학 칙청장아어산상왕릉지측 수장지여기언 무자왈 국양항어여왈 작견우씨귀우산상 불승분에 수여지전 퇴이사지 안후불인견국인 이고어조 차아이물 시용식송칠중어릉전
八年 魏遣使和親 秋九月 太后于氏薨 太后臨終遺言曰 妾失行 將何面目見國壤於地下 若群臣不忍擠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동천왕 8년에 위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에 태후이던 우씨가 사망했다. 태후가 종말을 앞두고 유언을 하였다. 첩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어느 정도는 면목볼 게 없으니까 지하에 파 묻으라. 그런데도 여러 군신들이 참지 못해서 무덤을 훼손할 일이 생기면 산상왕릉 측면에서 장례를 치른다고 우겨라. 이에 유언대로 장례를 거행하니까 무당들이 끼어드는데 토양을 소비하면서 까지 나서는 배후가 뭐냐 떠들어대니 우씨를 보고 산상에게로 귀가한다는 모양새가 최선책은 아닐 것이니 전쟁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것인데 퇴로를 보고 생각한 것이 강력하다. 나라 사람들이 보고 참지를 않는 것은 우씨 안면 낮빛일 것이니 정부에게 고해야 할 것은 정무 보시는데 장애물이 막혀 있다는 것이니 소나무 7송이를 식관해서 산상릉전 앞을 두껍게 외벽을 쳐야 한다는 것이다.
십년 춘이월 오왕손권 견사자호위통화 왕유기사 지추칠월 참지 전수어위
십일년 견사여위 하개년호 시경초원년야
십이년 위태위사마선왕솔중 토공손연 왕견주부대가 장병천인조지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
十二年 魏太尉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동천왕 10년 봄 2월이다. 오나라 왕 손권은 파견가는 사신과 함께 통화년에 동맹을 맺자고 하였다. 임금은 사신을 가을 7월까지 대기시켰다. 도망자를 사살하고서 위나라에 시체를 전달하였다.
동천왕 11년 사신을 위나라로 파견보냈다. 통화년을 하개년으로 불렀다. 그래서 경초 원년이 시작하였다.
동천왕 12년 위나라 태위 사마씨는 선왕에 병력을 통솔하는데 공손연을 정벌하였다. 임금이 주부대가를 파견해서 1천병력을 파병 보냈다.
십육년 왕견장 습파요동서안평
십칠년 춘정월 입왕자연불위왕태자 사국내
십구년 춘삼월 동해인헌미녀 왕납지후궁 동십월 출사침신라북변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十七年 春正月 立王子然弗爲王太子 赦國內
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동천왕 16년 임금이 장수를 파견해서 요동지역 서안평을 기습으로 파괴했다.
동천왕 17년 봄 정월이다. 왕자 연불이 입장해서 왕태자로 하였고 국내에 죄인을 사면하였다.
동천왕 19년 봄 3월이다. 동해에서 미녀를 봉헌하였다. 임금은 후궁에 납품하였다. 겨울 10월이다. 신라가 북변을 침입해서 사병을 출정보냈다.
이십년 추팔월 위견유주자사관구검 장만인 출현토래침 왕장보기이만인 역전어비류수상 패지 참수삼천여급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동천왕 20년 가을 8월 위나라에서 파견간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인을 데리고 현토에 출정해서 침략계획을 가진다. 임금은 보병 기병 2만인을 갖고서 비류수에서 전황을 반역하려 했으나 실패를 하였고 사망자가 3천명이 생겼다.
우인병재전어양맥지곡 우패지 참획삼천여인 왕위제장왈 위지대병 반불여아지소병 관구검자위지명장 금일명재아장악지중호 내령철기오천 진이격지 검위방진 결사이전 아군대궤 사자일만팔천여인 왕이일천여기 분압록원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毌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또 양맥곡에서 재전을 치르는 병력을 모았는데도 패전을 했으니 사망자가 3천명 나왔다. 임금은 여러 장수들에게서 말하는데 위나라는 대병력인가 아니면 소병력 흉내를 낸다는 것인가? 관구검이란 정체는 위나라에 명장일 경우는 금일 명령을 내려서 철기병 5천명으로 지중을 장악하라할 것이니 관구검이 방진을 갖춰서 접근 한 것이다. 전란이 결정나면 사망자는 엄청 나오니 또 졌다. 사망자가 1만8천명이다. 임금에게는 기병 1천명이 남아서 압록원으로 도망갔다.
동십월 검공함환도성 도지 내견장군왕기 추왕 왕분남옥저 지우죽령 군사분산태진 유동부밀우독재측 위왕왈 금추병심박 세불가탈 신청결사이어지 왕가둔의 수모사사 여지부적력전 왕근득탈이거 의산곡 취산졸자위 위왈 약유능취밀우자 후상지 하부유옥구전대왈 신시왕언 수어전지 견밀우복지 내부이지 왕침지이고 구이내소 왕간행전전 지남옥저 위군추불지 왕계궁세굴 불지소위 동부인뉴유진왈 세심위박 불가도사 신유우계 청이음식왕호위군 인사극자살피장 약신계득성 칙왕가분격결승의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 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겨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략하는데 도망자를 잡으려고 장군 왕기를 파견보내고 임금을 추격한다. 임금님은 남옥저로 피신가고 죽령에 도착을 하니까 병력이 흐트러져서 재정비할 틈이 없는 틈에서 동부 사람 밀우독이 전란을 보니까 임금에게 전략을 낸다. 지금 추격망을 뚫기는 힘빠진다. 뚫릴 정도도 아닌데 신하들이 하는 결사항전도 막지를 못한다. 임금님 피난가는 거도 여기까지만입니다. 이름 모를 사망자가 많이 생겨나니 웬수를 긁어모아 역전을 위해 필사 저항을 하니까 임금님이 겨우 의산곡으로 탈출을 한 것이다. 의산곡에서 병력을 취합하고서 자위대를 갖추니까 자위가 출정을 한다. 밀우독만한 사람이 존재한다면 상을 줄게. 아래에서 부유옥이 고구려 군 앞서 자위대를 향해 말을 하는데 신하가 되려는 자 여기서 시험을 보라는 것이다. 이어 전쟁지 탐방을 마치고 밀우독이 해 온 복지를 생각해 보니까 부유옥이 재림할 때가 아닌 것이다. 임금님은 고구려가 내소를 공략할 때 공무원들이 공략흐름을 짚어내지 않아서 남옥저로 피신보낸 것이다. 위군에서 추격이 멈추고 전략이 부재하다 보니까 임금님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동부 사람 유유가 진력을 하는 것이다. 위군 추격은 자위대도 못 막아요. 전멸을 할 수도 있어요. 제게 전략이 있어서 자위대를 어리석게 하려고 합니다. 음식을 요청해서 위군에게 위문공연을 벌이는데 빈틈을 찾아서 위군 장수를 사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전략이 득성을 마치면 남옥저를 공방지로 챙겨야 해요.
왕왈 낙 유유입위군사항왈 과군획죄어대국 도지해빈 조궁무지 장이청항어진전 귀사사구 선견소신 치불전지물 위종자수 위장문지 장수기항 유유은도식기 진전 발도자위장흉 여지구사 위군수난 왕분군위삼도 급격지 위군요난불능진 수자락랑이퇴 왕부국논공 이밀우유유위제일 사밀우거곡청목곡 사옥구압록두눌하원이위식읍 추증뉴유위구사자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임금님 대답은 이러하다. 유유가 위군에 입장하여 거짓 항복을 하는데 고구려가 위에 죄를 얻어서 해빈으로 달아났으나 몸조차 정착해 둘 곳 없는 땅에서 진전으로 항복을 합니다. 귀가를 시키려거든 사망자와 함께 보내주세요. 먼저 소신을 파견 보내고 음식을 두껍지 않은 걸로 챙겨왔으니 수납도 받아주세요. 위나라 장군이 듣고서 항복을 수리하려고 했으나 유유는 식기에 칼을 은닉하고 진전을 하였으니 위군 장흉을 칼로 찌르려 하였다. 끝내 함께 사망하려고 했다. 이에 위군에서는 수난이 생겨서 임금은 자위대를 3개로 나뉘어 급행스럽게 진격을 하니까 위군은 방진 갖추기가 요란으로 인해 실행이 안되었다. 위군은 낙랑으로 퇴각을 하였다. 임금은 공로를 갖고서 국부를 논의하니 밀우독과 유유를 1등으로 간주하였다. 밀우독에게는 거곡청목골을 하사하고 유유옥에게는 고구려 압록변 두눌하원을 하사하여 식읍을 내려주니 유유에게는 공증을 9번 하게 하였다.
우이기자다우위대사자 시역야 위장도숙신남계 각석기공 우도환도산 명불내성이귀 초 기신득래 견왕침반중국 수간 왕불종 득래탄왈 입견차지 장생봉호 수불식이사 관구검령제군 불괴기묘 불벌기수 득기처자 개방견지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毌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또 자식이 많을수록 대사자라 해온 거도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위군은 숙신 남쪽 지역까지 내려와서 공로를 각석에 실마리 풀었다. 환도산에 도착하고서 불내성이라 조각해놓으니까 귀가를 하였다. 초기에 신하 득래는 임금이 중국에서 배반하고 침입하려는 자들을 보고서 국간을 하였으나 임금이 실행하지를 않자 탄식을 하는데 그런 땅을 보고 있으려니 봉호가 출현하면 음식이 아니어도 사상자가 발생한다. 관구검은 여러 군대에 명령을 내리니 득래에 봉분은 훼손하지를 말며 나무조차 베지를 말라고 하니까 득래에서 처자들은 모두 방견하였다.
[괄지지운 불내성즉국내성야 성누석위지 차즉환도산여국내성상접 양서 이사마의토공손연 왕견장 습서안평 관구검래침 통감 이득래간왕 위왕위궁시사 오야]
[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毌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진수 삼국지에서 전한다. 불내성은 국내성으로 즉시 본 거도 성누각에 존재하는 비석으로 생겼으니 같은 게 환도산이 국내성과 서로 접속해 있다는 양서 기록은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하는데 임금이 장군을 파견해서 서안평을 기습하니까 관구검이 머지 않아 침략을 하였다는 자치통감은 득래가 임금에게 국간하였다는 부분이 임금님 위궁 시절이 만들어 낸 오류다
이십일년 춘이월 왕이환도성경난 불가부도 축평양성 이민급묘사 평양자본선인왕검지택야 혹운왕지도왕검
이십이년 춘이월 신라견사결화 추구월 왕훙 장어시원 호왈동천왕 국인회기은덕 막불애상 근신욕자살이순자중 사왕이위비례 금지 지장일 지묘자사자심다 국인벌시 이복기시 수명기지왈시원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 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 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동천왕 21년 봄 2월 임금이 환도성 경제를 흔들었다. 또 수도 건설을 하려는 게 아니다. 평양성을 축성하는데 백성들이 이민을 가는 거 만큼 묘사 단체도 옮겨갔다. 평양은 선인 왕검에서 거주지로 있어온 게 본분이다. 아니면 임금이 도읍지를 도읍해서 생겨난 명칭이 왕검이라 해서다.
동천왕 22년 봄2월 신라가 사신을 파견해서 화친을 결정하였다. 가을 9월에 임금이 사망했다. 시원에서 장례 치른다. 장례가 끝나고 동천왕이라 불린다. 나라 사람이 은덕을 생각할수록 슬픈 상처가 아닐 게 없었으니 동천왕에서 근신들이 서로 자살을 하려는 자들이 많아진 모양이다. 왕위 상속자는 예절이 아닐 경우에 금지를 시켰다. 장례일이 도래하니까 동천왕 무덤 주변에 사망자들이 늘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시원을 정벌하였다. 관을 뒤집으니까 이름대로 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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