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한자 연습

영문이 2022. 8. 6. 14:16

추팔월 부여왕대소사래양왕왈 아선왕 여선군동명왕상호 이유아신도지차 욕완취이성국가 부국유대소 인유장유 이소사대자 예야 이유사장자 순야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讓王曰 我先王 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 禮也 以幼事長者 順也

가을 8월이다. 부여왕 대소가 사신과 함께 와서 뭔 일인지 사양을 하며 말한다. 부여에 선왕은 선군이던 동명왕과 더불어 서로 호감을 가진 바, 부여에서 유혹을 하여도 신하이던 동명왕은 여기로 도망을 왔소. 국내에 국내성이 국가로 모였으니 끝내야 할 게 있소. 고구려에도 크고 작은 게 있으니까 사람도 노인과 아이가 있을 것이니 작은 일을 한다는 것이 크다는 게 예요. 아이들이 하는 것을 길다고 하는 게 순이요.

 

금왕약능이예순사아 칙천필우우지 국조영종 불연칙욕보기사직 난의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祐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 難矣

지금 임금이 예순에 올인하는 것을 잘할 것이라면, 돕는 것을 보니까 하늘이 본 뜰 것이며 국복이 길어지고 나서야 종료할 것이요. 예순에 올인하는 것이 아닐 경우에는 국왕에 사직 조차 온전히 보전하지 못할 것이외다.

 

어시 왕자위 입국일천 민잔병약 세합인치굴복 이도후효 내여군신모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効 乃與群臣謀

이에 임금은 짚었다. 고구려 입장은 역사가 좁아서 백성은 나약하고 군사는 약하기에 사기를 합쳐도 굴복한다는 것은 부끄러울 만큼 참을 일이다. 그래서 후일을 꾀하려면 본떠야 할 것이니 군신들은 어서 어서 모여들어서 꾀를 내시오.

 

보왈 과인벽재해우 미문예의 금승대왕지교 감불유명지종 시 왕자무휼 년상유소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결정을 했다. 과인은 피난길에 해우를 살폈다. 아직 예의를 못 들었다. 지금 대왕지교를 계승하는 것이니 목숨이 아까우면 따라하지 말지어다. 시대에 왕자 무휼이 있어서 어린애 치고는 숭상하게 보였다.

문왕욕포부여언 자견기사왈 아선조신영지손 현이다재 대왕투해 참지부왕 욕지이목마 고불안이출 금대왕불념전건 단시병다 경멸아방읍 청사자 귀보대왕 금유누난어차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임금님 소식을 듣고 포부가 있어서 여언을 사신이 보이게 말을 해보려 합니다. 내게서 조상은 신영에 손주입니다. 현명치 않아도 재능이 많아서 대왕님도 해칠 것이면 손해가 생겨요. 부왕을 참수하시려거든 목마를 욕보이세요. 오래동안 안전보장도 없이 내다 빼서 그래요. 지금 대왕님은 앞선 허물은 생각하지 마셔라. 어느 한 날에 군병이 많아지면 고구려를 경멸할 것이오니 사신에게 요청드립니다. 대왕님 보복을 하러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은 알 껍질 묶기가 전부에요.

약대왕불훼기난 칙신장사지 불연칙부 부여왕문지 편문군하 유일노구대왈 누난자위야 불훼기난자안야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扶餘王聞之 徧問群下 有一老嫗對曰 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대왕님이 알 훼손을 안하실 경우엔 칙서로 저를 고용해줘요. 안 그러면 본받을 께 없소이다. 이러한 것을 부여왕이 들었다. 말단 공무원까지 골고루 물어보고는 노파 1명이 대답한 것은 이러하다. 묶어둔 껍질이 위태한 것입니다. 알이 훼손되지 않은 것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기의왈 왕불지기위 이욕인지래 불여이위이안이자리야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그 뜻은 이러합니다. 임금이란 자신을 안다는 것을 위험하게 인식하지 않아서 사람을 부를까 멈출까 하오니 쉬운 위험을 따라하지 않을 만큼에 안전은 자리도 대신 못합니다.

이십구년 하육월 모천상유흑와여적와군투 흑와불승 사 의자왈 흑 북방지색 북부여파멸지징야 추칠월 작이궁어두곡

二十九年 夏六月 矛川上有黑蛙與赤蛙群鬪 黑蛙不勝 死 議者曰 黑 北方之色 北扶餘破滅之徵也 秋七月 作離宮於豆谷

유리왕 29년 여름 6월이다. 모천상에 있으니 검정 개구리와 적장 개구리가 전쟁을 하길래 검정 개구리가 승리 못하여 사망했다. 전쟁 결과다. 북방에 색상은 북부여 국이 파멸을 한다는 조짐입니다. 가을 7월이다. 궁실에서 궁만 두곡에 건설하였다.

삼십일년 한왕망발아병 벌호 오인불욕행 강박견지 개망출새 인범법위구 요서대윤전담추격지 위소살 주군귀구어아 엄우주언 맥인범법 의령주군 차위안지 금외피이대죄 공기수반 부여지속 필유화자 흉노미극 부여 예맥부기 차대우야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 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 穢貊復起 此大憂也

유리왕 31년이다. 한나라 왕망이 군사를 일으켜서 오랑캐 정벌을 하였다. 고구려 사람을 징병하려 했는데 안 되었다. 강박을 파견 보낸다. 흩어졌다. 국경에서 출정한 자들은 국법을 어기고 도둑이 되었다. 요서지역에 대윤이 전담을 추격하고서 사살하였다. 내게서 주군지역을 복귀한다는 게 재앙이다. 그래서 긴급하게 장계를 올린다. 맥인 사람들이 국법을 어기니 주군에 왕명을 내리셔서 안전을 위로해주세요. 진정 대죄를 범하였다고 피해다니다가는 배신이 두렵기에 끝내주세요. 부여로 가서 신속하게 화합하려고 드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흉노 정벌은 이긴 것이 아닙니다. 부여국과 예맥국은 다시 기적적으로 일어났으니 걱정거리가 또 생겼다.

왕망불청 조우격지 우유아장연비 참지 전수경사[량한서급남북사개운 유구려후추참지]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 斬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왕망이 안듣고 있으니까 진격을 재촉하였다. 장군 연비를 유혹하고서 참수하라. 적장 연비를 서울로 보내라.[전한서와 후한서와 남북국사에서 전한다. 고구려는 후추를 유혹하고 참수하였다]

망열지 갱명오왕위하구려후 포고천하 령함지언 어시 구한변지 유심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왕망은 심심해서 다시 오왕에 이름으로 고구려 아래부터는 돈을 풀 것이야. 그대들은 알 지어다. 이 시기에 한나라 국경에 도둑은 어느 정도가 퇴치되었다.

삼십이년 동십일월 부여인래침 왕사자무휼 솔사어지 무휼이병소 공불능적 설기계 친솔군 복우산곡이대지 부여병직지학반령하 복병발 격기불의 부여군대패 기마등산 무휼종병진살지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유리왕 32년 겨울 11월이다. 부여국 사람들이 국경에 침입하여 임금과 사신과 태자 무휼이 군사를 통솔하고 방어를 하고 있는데 태자 무휼에 병사가 감소하더니 적병이 잘싸워도 두려워 하지를 말라고 하더라. 전략회의를 열어서 태자가 군사를 통솔하더니 전장지 산곡에서 대기하던 매복을 만났다. 부여병사들은 학반령 아래에 도착을 하니 매복중이던 병사를 발견하고 진격할 뜻이 아니었다. 이에 부여군대가 패배하여서 마등산에서 도주를 하니 태자 무휼은 잔병을 사살하였다.

삼십삼년 춘정월 입왕자무휼위태자 위이군국지사 추팔월 왕명오이 마리 령병이만 서벌양맥 멸기국 진병습취한고구려현[현속현토군]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縣屬玄菟郡]

유리왕 33년 봄 정월이다. 왕자 무휼에 입장을 태자로 하면서 군국지사를 위임하게 되었다. 가을 8월이다. 임금이 오이 마리에게 영병 2만을 주고서 서쪽에 양나라 맥나라를 정벌하게 하였으니 그 나라들이 멸망하면서 기습 병사들을 취합하고서 한나라에 있는 고구려현으로 진격하였다. [여기 고구려현은 현토군이다]

삼십칠년 하사월 왕자여진 익수사 왕애통 사인구시 불득 후비류인제수득지 이문 수이예장어왕골령 사제수금십근 전십경 추칠월 왕행두곡 동십월 훙어두곡이궁 장어두곡동원 호위유리명왕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 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 田十頃 秋七月 王幸豆谷 冬十月 薨於豆谷離宮 葬於豆谷東原 號爲瑠璃明王

유리왕 37년 여름 4월이다. 왕자가 나루터에서 익수로 사망하였다. 임금이 많이도 슬펐다. 사신과 사람은 왕자 시신을 구하였는데 습득을 못했다. 후일에 비류인이 왕자 시신을 습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골령에서 임금은 예절대로 장사지내기를 끝내고 제사용품에 사용할 금 10, 10경을 하사하였다. 가을 7월이다. 임금이 두곡에 행차한다. 겨울 10월이다. 두곡에 소재지를 둔 이궁에서 임금이 사망하였다. 두곡동원에서 장사를 지내었으니 유리명왕으로 불렸다.

 

삼국사기 1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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