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한자 연습

영문이 2022. 8. 30. 10:15

삼국사기 16

고구려본기제사[신대왕 고국천왕 산상왕]

신대왕 휘백고[고 일작구] 태조대왕지계제 의표영특 성인서 초 차대왕무도 신민불친부 공유화난 해급어기 수둔어산곡 급차대왕피시 좌보어지류여군공의 견인영치 급지 어지류궤헌국새왈 선군불행기국 수유자 불극유국가 부인지심 귀우지인 근배계수 청즉존위 어시 부복삼양이후즉위 시년칠십칠세

高句麗本紀第四[新大王 故國川王 山上王]

新大王 諱伯固[固 一作句] 太祖大王之季弟 儀表英特 性仁恕 初 次大王無道 臣民不親附 恐有禍亂 害及於己 遂遯於山谷 及次大王被弑 左輔菸支留與群公議 遣人迎致 及至 菸支留跪獻國璽曰 先君不幸棄國 雖有子 不克有國家 夫人之心 歸于至仁 謹拜稽首 請卽尊位 於是 俯伏三讓而後卽位 時年七十七歲

고구려 본기 4번째 [신대왕 고국천왕 산상왕]

신대왕은 휘명이 백고다 [백구로도 전한다] 태조대왕 계부님 후손이다. 겉으로 나타낸 바로는 특출한 것은 아니나 성격에 용서해주기를 하면 인지상정인줄 알았다. 처음 차대왕에게서 무도한 것들을 보고는 신하와 백성이 아니면 임금에게 누구든지 붙어먹을 거 같아서 두려웠다. 재앙과 난동이 있을 거 같았다. 신대왕에게도 손해가 생기더니 산곡을 향해서 둔행길 하였고 이어 차대왕이 피살하였다는 것을 어지류를 좌보로 간주하고 군공을 의논하였다. 파견온 사람을 맞이하고 의논을 멈춘다. 어지류가 국새를 바치며 말한다. 선군에게 불행은 국가 버리기입니다. 자식이 있는 자들에서는 국가가 있어도 이겨낼 것이 아님은 부인에 마음입니다. 얼릉 귀국을 하세요. 근신히 절하고 계수를 하세요. 존위를 하겠다고 요청하세요. 이어서 거부를 할까봐 3번이나 엎드려서 간절하게 진행하였으니 후일에 즉위를 하였다. 이 때 77살이다.

이년 춘정월 하령왈 과인생첨왕친 본비군덕 향속우우지정 파괴이궐지모 외해난안 이군원둔 계문흉부 단극애최 개위백성낙추 군공권진 류이묘말 거우숭고 불감황녕 여섭연해 의추은이급원 수여중이자신 가대사국내 국인기문사령 무불환호경변

二年 春正月 下令曰 寡人生忝王親 本非君德 向屬友于之政 頗乖貽厥之謨 畏害難安 離群遠遯 洎聞凶訃 但極哀摧 豈謂百姓樂推 群公勸進 謬以眇末 據于崇高 不敢遑寧 如涉淵海 宜推恩而及遠 遂與衆而自新 可大赦國內 國人旣聞赦令 無不歡呼慶抃

신대왕 2년 봄 정월이다. 지시를 한다. 과인이 출생한 이례로 왕친을 욕보였으니 본래에 군덕은 아니나 신속히 벗과 함께 국정을 수행할 것이니 약간에 실수가 있는 전략도 모두 전달할지니 두려움, 손해, 어려움, 안전함이 고구려군을 이별하게 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고 도망가게 하기도 하는 바, 흉함과 부고는 계문해보니 쓸데없이 종결난 슬픔을 꺽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오락을 추천하기에 최고다. 그러니 나에 군대는 공로를 앞에 두면 전진을 권장할 것이며 잘못 보았다며 끝까지 가서는 사실에 근거를 해보고 숭고하게 대우할 것이니 바쁘게 편안하게 지내지를 말라. 연해주를 도해해야 한다. 연해주를 도해하는데 은혜를 추천할수록 멀게만 느껴지니 연해주를 도해하는데 함께 하는 자들에게는 스스로 새롭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국내에서는 대사면이 있을 것이다. 나라 사람이 과거에 잘못을 용서해준다는 것을 듣기라도 하면은 경사를 앞두고 축하도 안하고 있지 않으면 손뼉을 칠 것이니라.

왈 대재 신대왕지덕택야 초 명림답부지난 차대왕태자추안도찬 급문사왕사령 즉예왕문

曰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初 明臨答夫之難 次大王太子鄒安逃竄 及聞嗣王赦令 卽詣王門

이어서 크도다 크도다 신대왕 덕분이여라. 처음 명림답부난을 평정할 때 차대왕에 태자이던 추안이 도망가고 숨기 바빠서 마침내 상속한 왕이 명령으로 용서해준다는 것을 들으시고 임금님 출입문으로 행차한다는 예지이다.

고왈 향 국유재화 신불능사 둔우산곡 금문신정 감이죄고 약대왕거법정죄 기지시조 유명시청 약사이불사 방지원방 칙생사육골지혜야 신소원야

告曰 嚮 國有災禍 臣不能死 遯于山谷 今聞新政 敢以罪告 若大王據法定罪 棄之市朝 惟命是聽 若賜以不死 放之遠方 則生死肉骨之惠也 臣所願也

뭐를 궁금하였는지 지난 재화에 국가에 있던 신하는 모두 사망하지 않았다. 우산곡에 도망가서 새로운 국정을 듣는 지금은 죄를 고백하기로 힘을 쓰는 바, 대왕이 정죄를 법대로 처리하면 조정과 시장을 버리는 것이요. 명령을 생각하여 듣고자 하신다면 은덕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야 할 것이니 먼 곳에 추방을 하시는 것도 근육과 뼈와 은혜와 사체는 탄생을 본 뜨는 것이오니 신하에 소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비감망야 왕즉사구산뇌루두곡이소 잉봉위양국군 배답부위국상 가작위패자 령지내외병마겸영양맥부락 개좌우보위국상 시어차

非敢望也 王卽賜狗山瀨婁豆谷二所 仍封爲讓國君 拜答夫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

희망사항은 아니니 임금은 즉시 구산에 소재지를 둔 뇌루와 두곡을 하사하였다. 양국군으로 봉인하였다. 감사히 절하는 답부를 국상으로 하고 패자에게 직위를 더해주었는데 명령을 알아차린 내외병마들은 영양맥부를 추락시키고 모든 좌보와 우보를 국상으로 하였으니 처음 시작한 일이다는 것이다.

삼년 추구월 왕여졸본 사시조묘 동십월 왕지자졸본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신대왕 3년 가을 9월이다. 임금이 졸본에서 조묘를 향한 제사를 시작한다. 겨울 10월에 임금이 졸본에 출현했다.

사년 한현토군태수경림래침 살아군수백인 왕자항걸속현토

오년 왕견대가우거주부연인등 장병조현토태수공손도 토부산적

四年 漢玄菟郡太守耿臨來侵 殺我軍數百人 王自降乞屬玄菟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菟太守公孫度 討富山賊

신대왕 4년 한나라 현토군 태수 경림이 침입을 하여 고구려군 수백명을 사살하였으니 고구려 왕자가 항복을 구걸하여서 현토를 한나라가 가졌다.

신대왕 5년 임금이 대가우를 파견하여 주부이던 연인 등급에게 장병을 내려주고 현토태수 공손도에 조력을 명령하였다. 부산에 적을 토벌하라는 이유다.

팔년 동십일월 한이대병향아 왕문군신 전수숙편 중의왈 한병시중경아 약불출전 피이아위겁 수래 차아국산험이로애 차소위일부당관 만부막당자야 한병수중 무여아하 청출사어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群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신대왕 8년 겨울 11월이다. 한나라에서 대병력 파견을 요청해온다. 임금은 군신에게 자문을 구하고 한 전쟁에서 누굴 지켜야 하는 소식인지에 대해 중의무리들이 말한다. 한나라 병력은 고구려군을 가볍게 믿어서 전쟁에 출전하지 않으면 고구려에게 위겁을 보여줄 것이니 누구라도 쳐들어 올 것이요. 고구려 국은 산새가 험준한데다 진격로도 좁아서 한 사람이 진격로를 막아도 되는 수준입니다. 만병력이라도 상대자가 없다. 한나라 병력은 고구려가 어떻게 따를지 조차도 없을 것이니 요청대로 출전하시면 교수들을 방어하게 하면 됩니다.

답부왈 불연 한 국대민중 금이강병원투 기봉불가당야 이우병중자의전 병소자의수 병가지상야

答夫曰 不然 漢 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명림답부가 말한다.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한나라는 국가가 대민종족이라 지금 강병들이 먼 곳에서 전투중이라서 날 갈기는 불가능 하다고 봅니다. 안그래도 병력에서 전쟁이 가능한 자들은 작으며, 작은 병력들이 지키고 드는 것이 병가에서 상책입니다.

금한인천리전량 불능지구 약아심구고루 청야이대지 피필불과순월 기곤이귀 아이경졸박지 가이득지 왕연지 영성고수 한인공지불극 사졸기아인환 답부수수천기추지 전어좌원 한군대패 필마불반 왕대열 사답부좌원급질산 위식읍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 王然之 嬰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答夫帥數千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答夫坐原及質山 爲食邑

지금 한나라 사람들은 전투식량이 1천명뿐이라 지구전을 할수록 승산이 안되요. 고구려군이 구고루를 보수하고서 청야에서 대비를 하면 10달을 지나지 않으면 반드시 군량이 떨어져서 귀가할 것이니 이 때 굳센 군사를 조금 풀어서 전란에 뜻을 얻을 정도로만 챙기는 수준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농성전을 선택하시고 성벽 보수에 전념을 한다. 한나라 사람은 공격을 해도 이기지 못하니까 사졸들이 기아에 허덕인다. 답부를 통솔자로 1천 기병으로 추격을 하니 좌원 전쟁에서 한나라 군대는 대패하였다. 생포한 말은 돌려주지 않는다. 이에 좌원 전쟁에서 답부군은 질산을 식읍으로 하였다.

십이년 춘정월 군신청입태자 삼월 입왕자남무위왕태자

십사년 동십월병자회 일유식지

十二年 春正月 群臣請立太子 三月 立王子男武爲王太子

十四年 冬十月丙子晦 日有食之

신대왕 12년 봄 정월이다. 군신들이 태자에 입장을 요청한다. 3월이다. 왕자 남무가 입장하여 태자로 하였다.

신대왕 14년 겨울 10월 병자 그믐일이다. 일식이 떴다.

십오년 추구월 국상답부졸 년백십삼세 왕자림통 파조칠일 내이예장어질산 치수묘이십가 동십이월 왕훙 장어고국곡 호위신대왕

十五年 秋九月 國相答夫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乃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冬十二月 王薨 葬於故國谷 號爲新大王

신대왕 15년 가을 9월이다. 국상 답부가 사망했다. 113세다. 임금이 서럽게 통곡을 하느라 국정을 7일간 안 봤다. 질산에서 장례를 치러다 드리고 수묘가구 20가구를 놓았다. 겨울 12월에 임금이 사망했다. 고국곡에서 장례를 치러드리고, 신대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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