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遺事卷二, 紀異第二
삼국유사권이, 기이제이
文虎王法敏
문호왕법민
王初卽位.龍朔辛酉.泗沘南海中有死女尸.身長七十三尺.足長六尺.陰長三尺.
왕초즉위.용삭신유.사비남해중유사녀시.신장칠십삼척.족장육척.음장삼척.
임금이 즉위한 년도는 용삭인 신유년이다. 사비남해에는 여자 주검이 시체로 있다. 키가 73척이요 다리가 6척 몸이 3척이다.
或云身長十八尺.在封乾(乾封)二年丁卯.總章戊辰,王統兵.與仁問欽純等,至平壤.會唐兵滅麗.
혹운신장십팔척.재봉건(건봉)이년정묘.총장무진,왕통병.여인문흠순등,지평양.회당병멸려.
혹시 떠돌기로는 키가 18척이다. 미라로 봉인하였다고도 한다. 정묘 2년은 무진년이다. 문장을 총괄수집하였다. 임금이 통행하는 병력에 김인문과 김흠순은 평양에 도착하였다. 회의해보니 당병이 고구려를 멸망하고 있었다.
唐帥李勣獲高臧王還國.
당수이적획고장왕환국.
당나라 장수 이적은 고장왕을 획득하고 당나라로 돌아가던 때다.
(王之姓高.故云高臧.按唐書高記.現慶五年庚申,蘇定方等征百濟.後十二月大將軍契如何)
(왕지성고.고운고장.안당서고기.현경오년경신,소정방등정백제.후십이월대장군계여하)
(임금은 고씨다. 고장이다. 당서 고기를 인용하였다. 현경 5년 경신년에는 소정방이 백제 정벌단을 갖추고 후에 12월엔 대장군 계도 조금은 따른다)
爲浿道行軍大摠管.蘇定方爲遼東道大摠管.劉伯英爲平壤道大摠管.以伐高麗.
위패도행군대총관.소정방위요동도대총관.류백영위평양도대총관.이벌고려.
패도행군대총관을 선정하였다. 소정방은 요동도대총관으로 류백영은 평양도대총관으로 설정하고 고구려 정벌을 감행하였다.
又明年辛酉正月,蕭嗣業爲扶餘道摠管.任雅相爲浿江道摠管.率三十五萬軍,以伐高麗.
우명년신유정월,소사업위부여도총관.임아상위패강도총관.솔삼십오만군,이벌고려.
명년 신유년 정월에 소사업을 부여도총관으로, 임아상을 패강도총관으로 설정하니 35만군을 통솔하고 고구려 정벌을 감행하였다.
八月甲戌,蘇定方等及高麗戰于浿江敗亡.乾封元年丙寅六月,以龐同善,囗高臨,薛仁貴,李謹行等爲後援.
팔월갑술,소정방등급고려전우패강패망.건봉원년병인육월,이방동선,국고림,설인귀,이근행등위후원.
8월 갑술일. 소정방이 등급별로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는 패강에서 패망하였다. 건봉 원년인 병인년 유월은 전쟁에서 패망한 이유가 동선이 어지러웠음을 안 것이다. 고구려 나라로 부임을 하자 설인귀와 이근행은 후원부대를 맡았다.
九月.龐同善及高麗戰敗之.十二月己酉,以李勣爲遼東道行臺大摠管.率六摠管兵,以伐高麗.總章元年戊辰九月癸巳.李勣獲高臧王.
구월.방동선급고려전패지.십이월기유,이리적위요동도행대대총관.률육총관병,이벌고려.총장원년무진구월계사.이적획고장왕.
9월이다. 방동선은 고구려와 전쟁에서 또 패하였다. 12월 기유다. 리적을 선봉으로 요동도행대대총관으로 설정하고 육총관병을 리더하게 하고서 고구려 정벌을 감행하였다. 원년인 무진년 9월 계사일에 문장을 수집해보니까 이적이 고장왕을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十二月丁巳獻俘于帝.上元元年甲戌二月,劉仁軌爲雞林道摠管,以伐新羅.
십이얼정사헌부우제.상원원년갑술이월,류인궤위계림도총관,이벌신라.
12얼 정사일에 부여국 이제를 봉헌하였다. 상원 원년인 갑술년 2월에는 류인궤가 계림도총관으로 설정하여 신라정벌을 감행하였다.
而鄕古記云.唐遣陸路將軍孔恭水路將軍有相,興(與)新羅金庾信等滅之.而此云仁問,欽純等.無庾信.未詳.
이향고기운.당견육로장군공공수로장군유상,흥(여)신라김유신등멸지.이차운인문,흠순등.무유신.미상.
시골에서 들리는 얘기에서는 당나라가 파견하기를 육로에는 장군 공공을, 수로에는 장군 유상을 보내어 신라에 김유신등을 멸망하라는 것인데 이에 김인문과 김흠순은 유신이 없다고 하더니 상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時唐之游兵,諸將兵,有留鎭而將謀襲我者.王覺之.發兵之.
시당지유병,제장병,유류진이장모습아자.왕각지.발병지.
때에 당나라는 맥아더가 있어서 모든 장병들은 병정놀이를 하다가 꾀로 공습하기를 하는데 아차하는 순간에 임금이 발포병력에게 연마하기라고 하였다.
明年,高宗使召仁問等,讓之曰.爾請我兵以滅麗.害之何耶.乃下圓扉.鍊兵五十萬.以薛邦爲帥.欲伐新羅.
명년,고종사소인문등,양지왈.이청아병이멸려.해지하야.내하원비.련병오십만.이설방위수.욕벌신라.
올해는 고종에서 사신이 인문을 부르는데 사양하면서 말을 하더라. 아병은 청병을 통해서 고구려를 멸망하였다. 손해가 있으시다는 거죠. 복구비용을 산출해보니까 연병 50만으로 설인귀와 방효공이 장수로 임명되어서 신라 정벌할 욕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時義相師西學入唐.來見仁問.仁問以事諭之.相乃東還上聞.王甚憚之.會群臣問防禦策.
시의상사서학입당.래견인문.인문이사유지.상내동환상문.왕심탄지.회군신문방어책.
때에 의상대사가 서학을 하려고 당나라에 입국하고서 김인문을 만난다. 김인문은 사유를 설명하는데 서로가 동환을 하고서 임금님에게 조문을 가니까 깊은 탄식을 내 뱉으시는데 군신들이 모여서 방어책을 질문하고 있었다.
角干金天尊曰.近有明朗法師,入龍宮,傳秘法以來.請詔問之.
각간김천존왈.근유명랑법사,입용궁,전비법이래.청조문지.
각간이던 김천존이 말한다. 가까운 날에 명랑법사가 오셔서 용궁에 들어가시니 비법을 말하셔서 조문할 것을 요청합니다.
朗奏曰.狼山之南有神遊林.創四天王寺於其地.開設道場則可矣.
랑주왈.랑산지남유신유림.창사천왕사어기지.개설도장칙가의.
명랑법사가 주문한다. 낭산에서 남쪽은 귀신이 유림하는 놀이터다. 사천왕사를 창사할 영토라는 것이지. 사천왕사를 개설도하는 시험장 정도로 본뜨기 하자.
時有貞州使走報曰.唐兵無數至我境.廻槧海上.王召明朗曰.事已逼至,如何.朗曰,以彩帛假搆,宜矣.
시유정주사주보왈.당병무수지아경.회참해상.왕소명랑왈.사이피지,여하.랑왈,이채백가구,의의.
때에 정주라는 마을이 있어서 사신이 주보로 말한다. 당나라 병력이 아경 주변에 무수히 존재하여서 임금이 명랑에게 소개하며 말하니 핍박을 버리기에는 급사한다. 무얼 따라야 하나. 명랑이 말한다. 채백으로 디자인하고서 가짜로 이해를 구하는 것이 마땅할 일이다 고 하신다.
王以彩帛營寺.草搆五方神像.以瑜珈明僧十二員,明朗爲上首.作文豆婁秘密之法.
왕이채백영사.초구오방신상.이유가명승십이원,명랑위상수.작문두루비밀지법.
임금이 채백영사를 건축하고, 풀밭에 이해못할 오방신 형상을 세우고, 명승 12명으로 둥글게 둥글게 여자주변을 에워싸니까 명랑을 상수로 올린 것이다. 이에 두루비밀지법을 작문하였다.
時唐羅兵未交接.風濤怒起.唐舡皆沒於水.後改刱寺.名四天王寺.至今不墜壇席.
시당라병미교접.풍도로기.당강개몰어수.후개창사.명사천왕사.지금부추단석.
때에 당나라와 라 병력은 교접을 하지 않아서 풍도에는 분노로 기지개를 펴는데 당나라에 오강군 모두가 물에서 침몰하였다. 후일에 창사를 개정하기를 사천왕사로 하였다. 지금은 단석이 떨어지지 않는다.
(國史大改刱在調露元年己卯)
(국사대개창재조로원년기묘)
국사는 개창이 커졌다. 조로 원년 기묘를 보았다)
後年辛未.唐更遣趙憲爲帥.亦以五萬兵來征.又作其法.舡沒.
후년신미.당갱견조헌위사.역이오만병래정.우작기법.강몰
후년에 신미년에는 당나라가 다시 조헌을 파견하여 스승을 꾸려서 오만병으로 정벌을 감행하는데 전과 같은 전술로 인해서 강물 범람으로 침몰하였다.
如前.是時翰林郎朴文俊.隨仁問在獄中.高宗召文俊曰.汝國有何密法.再發大兵.無生還者.
여전.시시한림랑박문준.수인문재옥중.고종소문준왈.여국유하밀법.재발대병.무생환자.
앞서 한림낭인 박문준은 김인문을 따라 감옥에 방문하였다. 김인문이 문준에게 말하기를 너네 나라에 하밀법이 있어서 두 번 발병하다가 큰 전쟁이 생기는데 생환자가 없을 지경이다.
文俊奏曰.陪臣等來於上國一十餘年.不知本國之事.但遙聞一事爾.厚荷上國之恩.一統三國.
문준주왈.배신등래어상국일십여년.부지본국지사.단요문일사이.후하상국지은.일통삼국.
박문준이 주문한다. 신하에서 진급을 맞이하면 상국에 10년을 체류하니까 본국사정을 알지 않아서 쓸모없이 오랜 사실을 듣고 있으려니까 상국에서 은혜가 번거롭게도 두꺼우니 3국을 1제도권역화하였다.
欲報之德.新刱天王寺於狼山之南.祝皇壽萬年,長開法席而已.高宗聞之大悅.
욕보지덕.신창천왕사어랑산지남.축황수만년,장개법석이이.고종문지대열.
보복을 덕으로 하려는 건가. 천왕사가 신축 건물에서 랑산 남쪽인 걸 어떻게 들렸는지 황수만년을 축원하시네. 법회가 길게도 열리면 멈출꺼 같지만 고종이 듣자 크게 기뻐하였다.
乃遣禮部侍郞樂鵬龜,使於羅,審其寺.王先聞唐使將至.不宜見茲寺.乃別刱新寺於其南,待之.
내견예부시랑락봉구,사어라,심기사.왕선문당사선지.부의견자사.내별창신사어기남,대지
예부시 공무원 락봉구를 파견 보낼 때 사신이 라국 방문도 하였다. 임금이 선문하는데 당나라 사신은 잠시 멈추시오 하더라. 자사 양식을 보더니 마땅치 않으셨거든. 그래서 신사 건물에서 남쪽에 별창을 제작하고서 기다리라 하신거다.
使至曰.必先行香於皇帝祝壽之所天王寺.乃引見新寺.其使立於門前曰.不是四天王寺.乃望德遙山之寺.終不入.國人以金一千兩贈之.
사지왈.필선행향어황제축수지소천왕사.내인견신사.기사립어문전왈.부시사천왕사.내망덕요산지사.종부입.국인이금일천량증지.
사신이 보며 말한다. 반드시 향기가 선행해야 하고 황제가 쓰신 축문이 수명다하는 곳은 천왕사여야 하는데 신사를 보며 다니던 시점이다. 사신이 문전앞에서 직립한채로 말한다. 여기는 사천왕사가 아닐 수 있다. 덕유산사에 있는 사찰이 사천왕사로 바래어본다. 끝났어도 들어가지를 않았는데 나라사람이 금 일천량을 기증하였다는 것이다.
其使乃還奏曰.新羅刱天王寺.祝皇壽於新寺而已.因唐使之言.因名望德寺.
기사내환주왈.신라창천왕사.축황수어신사이이.인당사지언.인명망덕사.
사신이 환국길에 주문을 한다. 신라가 창건한 천왕사는 황제가 수기내린 축원인 신사가 뒈져서 당나라 사신이 말하고 가서 망덕사라고 명명하여진 것이다.
(或系孝昭王代.誤矣)
(혹계효소왕대.오의)
효소왕이 계보를 대신하였다는 것은 오류다)
王聞文俊善奏,帝有寬赦之意.乃命强首先生,作請放仁問表.以舍人遠禹奏於唐.帝見表流涕.赦仁問慰送之.
왕문문준선주,제유관사지의.내명강수선생,작청방인문표.이사인원우주어당.제견표류체.사인문위송지.
임금은 박문준이 하는 선주를 듣고서 황제에게도 관사하는 뜻이 있음을 알아차릴 때 강수선생이 명령을 내리는데, 작가 김인문이 낸 표문을 요청으로 방명한다는 것이다. 이에 관청 공무원은 당나라 사람이 우주를 보겠다고 하는데, 임금이 표문을 보시자 울어서 인문을 용서하면서 위문환송을 하였다는 것이다.
仁問在獄時.國人爲刱寺名仁容寺.開設觀音道場.及仁問來還.死於海上.改爲彌陁道場.至今猶存.
인문재옥시.국인위창사명인용사.개설관음도장.급인문래환.사어해상.개위미타도장.지금유존.
김인문이 옥중생활 하던 때에 국민은 창사를 하고서 인용사라 하였다. 인용사에는 관음도장을 개설하였고, 환국한 김인문도 방문하였는데 해상에서 사망하였다. 관음도장을 미타도장으로 개정하였고, 지금도(1200여년대) 존재하고 있다.
大王御國二十一年.以永隆陰二年辛巳崩.遺詔葬於東海中大巖上.
대왕어국이십일년.이영륭음이년신사붕.유조장어동해중대암상.
대왕은 어제까지 나라가 21년이었다. 영륭제는 음력으로 2년이니까 신사년에 붕어하셨다. 유사에서 장지를 조고하는데 동해에 있는 대왕암 위라 하였다.
王平時常謂智義法師曰.朕身後願爲護國大龍.崇奉佛法.守護邦家.法師曰.龍爲畜報何.
왕평시상위지의법사왈.짐신후원위호국대룡.숭봉불법.수호방가.법사왈.용위축보하.
임금은 평상시에도 항상 지의법사에게 상의하였다. 짐이 갖는 몸으로 후원을 한다면 호국대룡으로 할 것이다. 불법 받들기를 숭상하여서 방가워에도 수호할 것이다. 지의법사가 말한다. 용이라 하시면 긴축현실에 어떻게 보호를 하신다는 것인가요?
王曰.我厭世間榮華久矣.
왕왈.아염세간영화구의.
임금이 말한다. 내가 염라대왕 세상에서는 영화 틈을 오랫동안 연속하겠다.
若麤報爲畜.則雅合朕懷矣.
약추보위축.칙아합짐회의.
만약에 추악한 보복으로 저축할 것이라면 까마귀들이 합쳐져서 짐을 감싸게 되어갈 것이다.
王初卽位.置南山長倉.長五十步,廣十五步.貯米穀兵器.是爲右倉.
왕초즉위.치남산장창.장오십보,광십오보.저미곡병기.시위우창.
임금이 즉위하였다. 남산장에 창고를 존치하였다. 보통걸음 50걸음이요. 넓은걸음 15걸음 정도다. 여기가 창고에서 오른쪽으로 하였다.
天恩寺西北山上,是爲左倉.別本云.建福八年辛亥,築南山城.周二千八百五十步.則乃眞德王代始築.而至此乃重修爾.
천은사서북산상,시위좌창.별본운.건복팔년신해,축남산성.주이천팔백오십보.칙내진덕왕대시축.이지차내중수이.
천은사에서 서북쪽 산위를 좌창으로 하였다. 우좌창 별본에서 전한다. 건복 신해8년에 남산성을 축성하였으니 둘레가 2850걸음이다. 진덕왕대에 처음 건축하기를 법제화하고서 남산성을 중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又始築富山城.三年乃畢.安北河邊築鐵城.又欲築京師城郭.旣今眞吏.時義相法師聞之.
우시축부산성.삼년내필.안북하변축철성.우욕축경사성곽.기금진리.시의상법사문지.
또 부산성도 건축이 시작하면서 3년공사를 마쳤다. 안북하 해변에 철성을 건축하였다. 경사에 성곽을 끌어다가 건축하려고 하였으니 건축공법이 진리이다. 의상법사가 질문을 하던 때다.
致書報云.王之政敎明.則雖草丘盡(畫)地而爲城.民不敢踰.可以潔災進福.政敎苟不明.則雖有長城.災害未消.王於是正罷其役.麟德三年丙寅三月十日,
치서보운.왕지정교명.칙수초구진(화)지이위성.민부감유.가이결재진복.정교구부명.칙수유장성.재해미소.왕어시정파기역.린덕삼년병인삼월십일,
송치한 책이 보복한다. 임금이 하는 정교로 인하여 법을 밝혀도 민초는 언덕에서 쓰러지니까 지도를 가리켜 성이라 하였다. 백성은 감히 지도제작을 하지 않았다. 깨끗한 재앙이 행복으로 진행하는 정도로 여겼는데, 정교도 진실이지만 어둡다. 국법에 장성들이 여럿이 존재하지만 재앙도 해칠수록 소멸하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임금이 시정을 하여서 부역으로 정면돌파를 하였으니 린덕년 3년인 병인년 3월 10일에 생긴 일이다.
有人家婢名吉伊.一乳生三子.總章三年庚午正月七,漢歧部一山級干.[一作成山阿干婢].
유인가비명길이.일유생삼자.총장삼년경오정월칠,한기부일산급간.[일작성산아간비].
인가에서 노예 길이가 있었다. 일란성 세쌍둥이 출산을 하였다. 3년이던 경오년 정월 칠일에 노비문장을 수집하였다. 한기부에 있는 산에서 급하게 간행하였다. [성산지역 아간 이라는 자에 여자 노비라는 것도 있다]
一乳生四子.一女三子.國給穀二百石以賞之.又伐高麗.以其國王孫還國.置之眞骨位.
일유생사자.일녀삼자.국급곡이백석이상지.우벌고려.이기국왕손환국.치지진골위.
일란성 네쌍둥이가 출산하였는데 여자가 한명이고 남자가 세명이다. 나라에 공급하는 곡식이 이백석부터 상을 수여하였다. 또 고구려를 정벌도 하였다. 고구려 나라에서는 임금님 손주가 신라방문을 하였는데 진골직위를 작치하였다.
王一日召庶弟車得公曰.汝爲冢宰.均理百官.平章四海.
왕일일소소제거득공왈.여위총재.균리백관.평장사해.
임금이 하루는 호출하셨는데 여러 제자들이 거득공에게 말하였다. 총재라는 것이 백관들을 균등하게 이해시키는 것이니까 평등이라는 문장도 사해를 간다는 것이다.
公曰.陛下若以小臣爲宰.則臣願潛行國內.示民間徭役之勞逸,租賦之輕重,官吏之淸濁.然後就職.
공왈.폐하약이소신위재.칙신원잠행국내.시민간노역지노일,조부지경중,관리지청탁.연후취직.
거득공이 말한다. 폐하가 만약으로 소신을 재상으로 여길 것이라면, 신원조회하기가 국내를 잠시유행할 것이고, 시민사이에서 노역이 노동을 하면 달아날 것이고, 조세부가하기도 경중이 작용하여서 관리자들에게 청탁도 생기니 안 좋은 일을 겪고서야 취직을 하는 것입니다.
王聽之.公著緇衣,把琵琶,爲居士形.出京師.經由阿瑟羅州(今溟州.)牛首州(今春州)北原京(今忠州).至於武珍州(今海陽).
왕청지.공착치의,파비파,위거사형.출경사.경유아슬라주(금명주)우수주(금춘주)북원경(금충주).지어무진주(금해양).
임금이 청취하였다. 거득공에서 검은 옷을 붙잡고 운학을 잡은 것이다. 거사라는 모형이 탄생하였다. 서울에서 출사를 한 거사는 강릉을 경유하여 춘천에 가고 충주를 거쳐서 광주광역시에 내려 온 것이다.
巡行里閈.州吏安吉見是異人.邀致其家.盡情供億.至夜安吉喚妻妾三人曰.今茲侍宿客居士者.終身偕老.
순행리한.주리안길견시이인.요치기가.진정공억.지야안길환처첩삼인왈.금자시숙객거사자.종신해로.
순행길에서 마을 문을 보았다. 주리 안길 눈에는 이인이 있었다. 요기 집에서 안치하고 진정으로 공억을 하려는 데에 밤이 되니까 안길이가 처와 첩 그리고 3명을 부르며 말을 하더라. 이번에 시숙을 하는 손님 자리는 거사들이다. 퇴실하는날까지 함께 노동을 하여라고 당부하였다.
二妻曰.寧不並居.何以於人同宿.其一妻曰.公若許終身並居.則承命矣.從之.
이처왈.녕부병거.하이어인동숙.기일처왈.공약허종신병거.칙승명의.종지.
아내 두 번째가 말한다. 돈녕은 병거가 아니다. 사람이 동숙하는 이유는 뭔가? 아내 첫 번째가 말한다. 퇴실할때까지 병거를 해야 하는 공로가 존재한다면 명령이 법이여야만 계승하겠다. 따르겠다.
詰旦居士欲辭行時曰.僕京師人也.吾家在皇龍皇聖二寺之間.吾名端午也.
힐단거사욕사행시왈.복경사인야.오가재황룡황성이사지간.오명단오야.
거사는 아침마다 사행시를 할 생각이 있냐고 하시더니, 나는 서울에서 사인입니다. 나에서 집은 황룡과 황성 두 개 절 틈이다보니까 단오라는 것이다.
(俗謂端午爲車衣)
(속위단오위거의)
속설에 존재해온 단어는 이사짐의류를 말한다.
主人若到京師.尋訪吾家幸矣.遂行到京師,居冢宰.國之制,每以外州之吏一人,上守京中諸曹.注.今之其人也.
주인약도경사.심방오가행의.수행도경사,거총재.국지제,매이외주지사일인,상수경중제조.주.금지기인야.
주인이랑 약속하고 경사에 도착을 하고, 내 집이 가질 행복을 심사하였다. 경사도 도둑수행을 하더니 총재로 존재하였다. 나라에 제도권이 언제나 외주 속에 있을 한 명이라는 사신이니 수경사가 여러 마을에 주석을 수행하는 것도 금일에 X맨이 한 것이다.
安吉當次上守至京師.問兩寺之間端午居士之家.人莫知者.安吉久立道左.
안길당차상수지경사.문량사지간단오거사지가.인막지자.안길구립도좌.
안길은 수당하려고 경사가 오면 상수하려고 문량사 틈에서 거사네 집으로 단오를 시행하더니 사람이 없다는 걸 알 때에 안길은 오랫동안 도좌로 구립하였다.
有一老翁經過.聞其言.良久佇思曰.二寺間一家,殆大內也.端午者乃車得令公也.
유일로옹경과.문기언.량구저사왈.이사간일가,태대내야.단오자내거득령공야.
노인 한명인 옹이 경과를 보고 있길래 말을 들으니 양구를 오랫동안 생각하는데, 두 개 절 사이에 있는 집은 위험하게도 크게 들이대었다. 거득령공이 단오를 할 적이다.
潛行外郡時.殆汝有緣契乎.安吉陳其實.老人曰,
잠행외군시.태여유연계호.안길진기실.노인왈,
외군이 잠행하려는 때에 위태하게 저고리를 만지네. 안길이 실제로 진열하고 있으니 노인이 뭐라고 한다.
汝去宮城之西歸正門.待宮女出入者告之.安吉從之.告武珍州安吉進於門矣.
여거궁성지서귀정문.대궁녀출입자고지.안길종지.고무진주안길진어문의.
궁성 서쪽에 정문을 향하여 돌아갈거냐? 기다리는 궁녀는 출입자들이 고백을 한다. 안길도 쫓는다. 광주광역시에서 안길이 출입문으로 진행한다고 고백하여라.
公聞而走出.携手入宮.喚出公之妃.與安吉共宴.具饌至五十味聞於上.
공문이주출.휴수입궁.환출공지비.여안길공연.구찬지오십미문어상.
거득공이 듣다가 냅다 달려간 곳이 손으로 끌어서 입궁까지 갔다. 거득공을 소환하는 왕비는 안길과 공연을 하고 있는데 50수라상을 갖추고 위 소식을 듣는다.
以星浮山(一作星損乎山)下,爲武珍州上守繞(燒)木田.
이성부산(일작성손호산)하,위무진주상수요(소)목전.
성부산 아래에서는(성손호산이다) 광주광역시를 상수에서 요새화 하려고 목전을 개발하였다.
禁人樵採.人不敢近.內外欽羡之.山下有田三十畝.下種三石.此田稔歲.武珍州亦稔.否則亦否云.
금인초채.인부감근.내외흠이지.산하유전삼십무.하종삼석.차전임세.무진주역임.부칙역부운.
겁내는 사람은 잡초뽑고, 일당쟁이들은 감히 근접하지를 못하니까 내외로는 공경이 늘어간다. 산 아래에는 개간하는 밭이 30무요 노예만 3석이라서 밭에 임시로 세금을 매겼다. 광주광역시에도 세금을 매겼는데 법령이 아니었다고 조례에 근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