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扶餘 前百濟 北扶餘 已見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이견
扶餘郡者.前百濟王都也.或稱所夫里郡.按三國史記.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移都於泗沘.國號南扶餘.
부여군자.전백제왕도야.혹칭소부리군.안삼국사기.백제성왕이십육년무오춘,이도어사비.국호남부여.
부여군이란 전백제에서 왕도다. 부리군으로 구칭하는데 삼국사기를 인용해보면 백제국 성왕26년 무오년 봄에 도읍을 사비로 이전한다고 하였고, 남부여로 부른 것이다.
<注曰,其他名所夫里.泗沘,今之古省津也.所夫里者,扶餘之別號也.己上注>
<주왈,기타명소부리.사비,금지고성진야.소부리자,부여지별호야.기상주>
〈주석을 본다. 타명에 있는 부리 사비는 지금날 고성진이다. 부리는 부여에서 이별하며 불리는 명칭이다. 위 주석이 맞다〉
又按量田帳籍曰,所夫里郡田丁,柱貝占.今言扶餘郡者,復上古之名也.百濟王姓扶氏.故稱之.或稱餘州者.郡西資福寺高座之上,有繡帳焉.
우안양전장적왈,소부리군전정,주패점.금언부여군자,부상고지명야.백제왕성부씨.고칭지.혹칭여주자.군서자복사고좌지상,유수장언.
또 양전장군 서적을 인용한다. 부리군은 밭이다. 주패로 점을 친다. 오늘날 말하는 부여군이란 다시 고명을 일컫는다. 백제 임금님 성씨도 부씨다. 오래동안 구칭을 해오니 여주를 구칭하는 것은 부여군 서쪽에 자복사를 말하는데 좌표가 높다는 것이 수장들만 존재한다.
其繡文曰.統和十五年丁酉五月日餘州功德大寺繡帳.又昔者,河南置林州刺史.其時圖籍之內.有餘州二字.林州,今佳林郡也.餘州,今之扶餘郡也.
기수문왈.통화십오년정유오월일여주공덕대사수장.우석자,하남치림주자사.기시도적지내.유여주이자.림주,금가림군야.여주,금지부여군야.
수문을 본다. 통화 15년은 정유년이다. 5월 어느날, 여주 공덕이 있는 대사 수장이다. 석이란 하남을 둔 임주지역 주자사를 말하고, 도서관을 들이는 때에 여주 두 글자가 있었으니 림주란 가림군이다. 여주는 부여군이다.
百濟地理志曰.後漢書曰.三韓凡七十八國.百濟是其一國焉.北史云.百濟東極新羅.西南限大海.北際漢江.其郡曰居拔城.又云固麻城.其外更有五方城.
백제지리지왈.후한서왈.삼한범칠십팔국.백제시기일국언.북사운.백제동극신라.서남한대해.북제한강.기군왈거발성.우운고마성.기외갱유오방성.
백제본기 지리지와 후한서를 본다. 삼한에는 총 78국가다. 백제도 1국가를 구성하였다. 북사를 본다. 백제 동쪽 끝즈음에 신라가 있다. 백제에서 서쪽 남쪽은 큰 바다가 있다. 북쪽에는 한강을 사이에 두니 그 고을이 거발성이다. 또 고마성 이라고도 한다. 고마성, 거발성을 제외하고 5방을 구축하고 있었다.
通典云.百濟南接新羅.北距高麗.夫限大海.舊唐書云.百濟,扶餘之別種.東北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北高麗.其王所居,有東西兩城.
통전운.백제남접신라.북거고려.부한대해.구당서운.백제,부여지별종.동북신라.서도해(지)월주.남도해지왜.북고려.기왕소거,유동서량성.
통전을 본다. 백제 남쪽에 접근해온 신라. 북쪽에 고구려가 있어서 바다를 경계로 삼았다. 구당서를 본다. 백제라는 것은 부여에 별종이다. 백제에서 동북쪽은 신라다. 서쪽은 도해를 하면 월주에 도착한다. 백제 남쪽에서 바다 건너면 왜국이다. 백제 북쪽은 고구려가 있는데 고구려 임금이 기거한다. 백제는 동쪽과 서쪽에 성을 구축하였다.
新唐書云.百濟西界越州.南倭.皆踰海.北高麗.
신당서운.백제서계월주.남왜.개유해.북고려.
신당서를 본다. 백제에서 서쪽 경계는 월주. 남쪽은 왜국으로 보는 것은 모두 바다를 넘나들면서 생겼다.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史本記云.百濟始祖溫祚,其父雛牟蒙.或云朱蒙.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州之王無子.只有三女.見朱蒙知非常人.以第二女妻之.未幾.扶餘州王薨.朱蒙嗣位.生二子.長曰沸流.次曰溫祚.恐後太子所不容.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百姓從之者多.遂至漢山.登負兒岳.望可居之地.沸流欲居於海濱.
사본기운.백제시조온조,기부추모몽.혹운주몽.자북부여도난.지졸본부여.주지왕무자.지유삼녀.견주몽지비상인.이제이녀처지.미기.부여주왕훙.주몽사위.생이자.장왈비류.차왈온조.공후태자소불용.수여오간,마려등(십)신남행.백성종지자다.수지한산.등부아악.망가거지지.비류욕거어해빈.
백제 본기를 본다. 백제 시작은 온조에서다. 아빠는 추모몽 또는 주몽으로 있다. 북부여에서 도망치기를 어렵게 하여서 졸본부여에 도착을 한다. 졸본주에서는 임금에게 자식이 없다. 여자 3명만이 있다. 주몽을 보고는 상인이 아닐꺼라고 알았다. 두 번째 여자를 시집보내는데 눈치가 없다. 졸본부여주 임금이 사망하면서 주몽은 사위가 되었다. 장남이 비류와 차남이 온조인 것이다. 주몽 공에서는 후태자에서 얼굴이 아닌 것이다. 오간 마려 신하 10명과 함께 남행을 결정 한 것이다. 백성에서 따라 붙는 자가 많은 모양이다. 한산에 도착을 하고 부아악에 등산을 해보니 사람이 거주하는 곳을 살피는데 해빈 방면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北帶漢水.東據高岳.南望沃澤.西阻大海.其天險地利.難得之勢.作都於斯.不亦宜乎.
십신간왈.유차하남지지.북대한수.동거고악.남망옥택.서조대해.기천험지리.난득지세.작도어사.불역의호.
신하 10명이 간언을 한다. 여기 하남땅에서는 북쪽에 대방 한수가 흐르고, 동쪽에는 고악이 존재하고, 남쪽에는 옥저 선택을 희망하고, 서쪽에는 대해가 있으니 하늘도 위태로울 지리조건을 갖추었다. 어렵게 실현할 수 있는 세력은 도읍지 제작에 써 볼 수 있다. 성역화에서는 아닐 수 있다.
沸流不聽.分其民,歸彌雛忽居之.溫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爲輔翼.國號十濟.是漢成帝鴻佳三年也.
비류불청.분기민,귀미추홀거지.온조도하남위례성.이십신위보익.국호십제.시한성제홍가삼년야.
비류는 듣지 않으니까 백성이 나뉘어지는데 미추홀로 돌아가서 지낸다. 온조도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는다. 신하 10명을 보익으로 하면서 국가는 십제로 하는 것이다. 이 시즌이 한나라 성제 홍가3년이던 날이다.
沸流以彌雛忽土濕水鹹.不得安居.歸見慰禮都邑鼎定,人民安泰.遂慙悔而死.其臣民皆歸於慰禮城.後以來時百姓樂悅.改號百濟.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비류이미추홀토습수함.불득안거.귀견위례도읍정정,인민안태.수참회이사.기신민개귀어위례성.후이래시백성낙열.개호백제.기세계여고구려동출부여.
비류에서는 미추홀 지역이 땅이 축축하고 물맛은 짜니까 편안하게 있어도 실현하지를 않았다. 돌아가서 위례도읍정을 보고나니 결정한 것은 인민은 편안해야 커진다는 것이다. 수습중에 참회를 하면서 비류는 사망한다. 신민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복귀를 하는 것이다. 후일에 돌아오는 때에는 백성들도 기뻐서 백제로 개국한 것이다. 백제라는 세계는 고구려와 동격으로 부여 출신국이다.
신민은 담덕이 보는 부여출신 백성을 신민으로 보았다.
故以爲解氏.後至聖王.移都於泗沘.今扶餘郡.(彌雛忽,仁州.慰禮,今稷山).按古典記云.東明王第三子溫祖.以前漢鴻佳(嘉)三年癸酉.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稱王.
고이위해씨.후지성왕.이도어사비.금부여군.(미추홀,인주.위례,금직산).안고전기운.동명왕제삼자온조.이전한홍가(가)삼년계유.자졸본부여,지위례성.입도칭왕.
오래동안 해모수로 인해온 흔적은 후일에 성왕으로 하였고, 사비지역으로 도읍 이전을 하는데 부여군이라는 것이다. (미추홀, 인천, 위례, 금직산)이다. 오래동안 전기를 본다. 동명왕에서 제3인 온조는 전한시대 홍가 3년은 계유년이다. 탄생지는 졸본부여이며 도착지는 위례성에서 임금으로 입도를 한 것이다.
고이해위씨는 아니다. 고이위해씨 이다.
十四年丙辰,移都漢山(今廣州).歷三百八十九年.至十三世近肖古王,咸安元年.取高句麗南平壤,移都北漢城.(今楊州).歷一百五年.至二十二世文周王卽位.
십사년병진,이도한산(금광주).력삼백팔십구년.지십삼세근초고왕,함안원년.취고구려남평양,이도북한성.(금양주).력일백오년.지이십이세문주왕즉위.
14년 병진년이다. 한산으로 도읍을 옮긴다. (경기도 광주다) 389년 흐른 역사 이래로 30세 근초고왕이 군림하는데 함안 원년이라 쓴다. 고구려에서 남평양을 취합하였다. 도읍을 북한성으로 옮긴다 (경기도 양주다) 105년은 흐른 역사에 22세에 문주왕이 즉위를 한다.
元徽三年乙卯.移都能川(今公州).歷六十三年.至二十六世聖王.移都所夫里.國號南扶餘.至三十一世義慈王.歷一百二十年.至唐顯慶五年.是義慈王在位二十年.
원휘삼년을묘.이도능천(금공주).력육십삼년.지이십육세성왕.이도소부리.국호남부여.지삼십일세의자왕.력일백이십년.지당현경오년.시의자왕재위이십년.
원휘 삼년은 을묘년이다. 문주왕은 능천으로 도읍을 이전한다. (충남 공주다) 63년이 흐른 역사에 26세 성왕이 즉위를 하는데 부리로 도읍을 옮기면서 남부여라 부른다. 31세 의자왕시대에 120년이 흐르니 당나라 현경 5년이다. 의자왕이 왕업을 가진지 20년이 흐른 것이다.
新羅金庾信與蘇定方討平之.百濟國舊有五部.分統三十七郡,二百濟城,七十六萬戶.唐以(其)地.分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府.
신라김유신여소정방토평지.백제국구유오부.분통삼십칠군,이백제성,칠십육만호.당이(기)지.분치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등오도독부.
신라 김유신 더하기 소정방이 평지 토벌을 하는 것이다. 백제국은 오래동안 5부가 있고, 5부 나누면 37군 군현이 있고, 성벽이 2백개 76만 가구는 당나라에서는 백제 땅을 분단하여 놓는다.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에 5도독부를 설치한 것이다.
仍(以)其酋長爲都督府刺史.未幾.新邏盡幷其地.置熊,全,武三州及諸郡縣.又虎嵓寺有政事嵓.國家將議宰相.卽書當選煮名,或三四.函封置嵓上.須臾取看名,上有印跡者爲相.
잉(이)기추장위도독부자사.미기.신라진병기지.치웅,전,무삼주급제군현.우호암사유정사암.국가장의재상.즉서당선자명,혹삼사.함봉치암상.수유취간명,상유인적자위상.
도독부 설치하면서 추장을 운영하는데 추장은 도독부사를 운영하는 사관이다. 낌새가 없다. 신규 운행으로 땅을 병합해보고 웅진에 5도독 본부를 둔다. 전라북도 전주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에 여러 군현을 엮고서는 다시 호암사를 창건하면서 나라일을 보니까 정사암이라 하였다. 국가는 의논을 하려면 재상이 있어야 한 것이다. 재상이란 책쓰기 하는 당선자 이름이다. 당선자 함은 봉치암 위에 3개 4개 정도로 봉인을 하고서 수유에서 간명을 뽑으니 도장에서 자방고전字倣古篆하는 자를 상 으로 하였다.
故名之.又泗沘河邊有一嵓.蘇定方嘗坐此上.표釣魚龍而出.
고명지.우사비하변유일암.소정방상좌차상.표조어룡이출.
예 이름이다. 또 사비에서 하변은 일암으로 변하는데 소정방이 바위에 상좌하였대서다. 어룡낚시가 출시한다.
故嵓上有龍跪之跡.因名龍嵓.又郡中有三山.曰日山,吳山,浮山.國家全盛之時,各有神人居其上.飛相往來.朝夕不絶.又泗沘崖又有一石.可坐十餘人.
고암상유룡궤지적.인명룡암.우군중유삼산.왈일산,오산,부산.국가전성지시,각유신인거기상.비상왕래.조석불절.우사비애우유일석.가좌십여인.
바위에는 용이 꿇어앉은 자취가 존재하여서 용암으로 불렸고, 근처 고을에 3산이 존재하여서 일산 오산 부산이다. 백제국가 전성시대에서는 3산에 3신들이 위로 계셔서 날아가기 정착하기가 일상이셔서 아침과 저녁에도 방문객이 멈추질 않았다. 또 사비에서는 낭떠러지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좌석이 10명이면 풀바위이다.
百濟王欲幸王興寺禮佛.先於此石望拜佛.其石自煖.因名ㄸ石.又泗沘河兩崖如晝屛.百濟王每遊冥歌舞.
백제왕욕행왕흥사예불.선어차석망배불.기석자난.인명ㄸ석.우사비하양애여주병.백제왕매유명가무.
백제 임금님이 왕흥사에 예불 다녀보시려고 먼저 차석을 향하여 배불을 하셨다. 돌이 온돌이라서 ㄸ석으로 하였다. 사비에 하양을 가면 낭떠러지 모양새가 주병을 닮아서 있는데 백제 임금은 언제나 어둠이 오면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故至今稱爲大王浦.又始祖溫祚乃東明第三子.體洪大.性孝友.善騎射.又多婁王.寬厚有威望.
고지금칭위대왕포.우시조온조내동명제삼자.체홍대.성효우.선기사.우다루왕.관후유위망.
예날 현재 대왕포로 구칭하는 현장에 왔다. 또 시조로 추앙하는 온조는 동명왕에서 셋째 아들이다. 몸이 홍대다. 우애가 있으신 성격으로 말타기 화살 쏘기를 잘 하신다. 다루왕도 있으니 관상이 두꺼비라서 위엄 있게 보이려 하셨다.
又沙沸王.(一作沙伊王).仇首崩,嗣位.而幼少不能政.卽廢而立古爾王.或云,至樂初二年己未,乃崩.古爾方立.
우사비왕.(일작사이왕).구수붕,사위.이유소불능정.즉폐이입고이왕.혹운,지락초이년기미,내붕.고이방입.
사비왕(사이왕으로 쓴다)은 구수왕 전쟁에 패배하여 사망하셨다. 왕위를 계승하셨는데, 아기 시절에서는 나라일을 돌보지 않으셨지만 폐법과 입법을 선택하기는 고이왕처럼 나라일을 돌보셨는데 락초 2년인 기미년이 되시더니 사망하시면서 고이왕이 지방자치에 입장하셨다.
武王(古本作武康.非也.百濟無武康)
무왕(고본작무강.비야.백제무무강)
무왕이다. (무강은 아니다. 백제에서는 무강이 없다)
第三十,武王名璋.母寡居.築室於京師南池邊.池龍交通而生.小名薯童.器量難測.常掘薯蕷.賣爲活業.國人因以爲名.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
제삼십,무왕명장.모과거.축실어경사남지변.지룡교통이생.소명서동.기량난측.상굴서여.매위활업.국인인이위명.문신라진평왕제삼공주선화(일작선화).
제33 무왕은 이름이 장이다. 엄마는 과거다. 건축은 서울스승님 남쪽 연못 변두리에 건설하였다. 연못에 용이 교통하고나니까 탄생하여서 꼬맹이 시절에는 서동으로 불리니 기량을 측정한다는 것이 어렵다보니 참마 장사꾼이기도 하다. 장사하는 품목이 참마였고 생업이기도 하였다. 국가 사람들이 명단에 오르게 되었는데 신라국 진평왕에게는 세 째 공주인 선화소식을 들은 것이다.
美艶無雙.剃髮來京師.以薯蕷餉閭里羣童.羣童親附之.乃作謠.誘群童而唱之云.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乙卯抱遣去如.
미염무쌍.체발래경사.이서여향려리군동.군동친부지.내작요.유군동이창지운.선화공주주은타밀지가량치고서동방을야의을묘포견거여.
아름답기 곱기가 트윈스조차 없고 이발한 상태로 경사를 방문한다. 참마 장사꾼은 세금납부하러 마을 문 앞에 어린이 들과 함께 등장을 하니 몸소 붙는다. 동요를 제작하였다. 어린이들을 유혹하려고 창가를 제작하였다.
선화공주는 주인을 숨겨두고 장사꾼에게 시집을 간다. 양치도 하였다. 서동방으로 을날 밤에 떠난지 오래다. 을묘년에 파견나가서 가게 한다.
묘을이 아니다. 을묘다.
東謠滿京.達於宮禁.百官極諫.竄流公主於遠方.將行.王后以純金一斗贈行.公主將至竄所.薯童出拜途中.將欲侍衛而行.公主雖不識其從來.偶爾信悅.因此隨行.潛通焉.
동요만경.달어궁금.백관극간.찬류공주어원방.장행.왕후이순금일두증행.공주장지찬소.서동출배도중.장욕시위이행.공주수불식기종래.우이신열.인차수행.잠통언.
동요는 서울에 울려퍼지니 궁궐에서는 금지곡으로 지정을 하는데 백관들이 간언하여도 해제를 안한다. 찬류공주는 먼 곳에 방이 있는데도 함께 동행을 하는 것이다. 왕후는 순금 1두를 증빙으로 보낸다. 찬류공주가 숨었다. 서동이 배도로 출사하는데 왕에 시위자들이 가는 행렬을 보려는 것이다. 찬류공주를 식별하는 것도 아닌데도 왕래를 감행한 것이다. 선화공주 짝꿍이라서 믿어서 기뻤나보다. 수행하는 업자가 여기서 잠들자며 통사정을 한다.
然後知薯童名.乃信童謠之驗.同至百濟.出母后所贈金.將謀計活.薯童大笑曰.此何物也.
연후지서동명.내신동요지험.동지백제.출모후소증금.장모계활.서동대소왈.차하물야.
자연적으로 훗날에 이름 서동을 알아서 동요를 믿음에 증거로 하면서 백제에 도착을 하였다. 왕후가 증험한 금을 제출하려는데 전략이 있어야 산다는 것이다. 서동이 크게 웃겼던지 이번 물건은 뭔가요??
主曰.此是黃金.可致百年之富.薯童曰.吾自小掘薯之地.委積如泥土.主聞大驚曰.此是天下至寶.君今知金之所在.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薯童曰可.
주왈.차시황금.가치백년지부.서동왈.오자소굴서지지.위적여니토.주문대경왈.차시천하지보.군금지금지소재.칙차보수송부모궁전하여.서동왈가.
찬류공주가 말한다. 이거는 황금입니다. 백년 정도 부유해지는 것이지요. 서동이 말한다. 나는 작은 땅굴을 파서 땅에 참마를 캐내는데 흙이 진흙으로 쌓여져 간 것을 맡긴 거로 보입니다. 찬류공주가 듣고서 크게 놀래니 천하에 보물이다. 임금님께서 금을 보낸 소재를 아시니까 황금을 수송한 부모가 계시는 궁전행 하시는 것이 어떤가요?? 서동은 알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於是聚金.積如丘陵.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問輸金之計.師曰.吾以神力可輸.將金來矣.主作書,
어시취금.적여구릉.예용화산사자사지명법사소.문수금지계.사왈.오이신력가수.장금래의.주작서,
황금을 모으니 구릉처럼 쌓여서 용화산에 사자사가 있는 지명법사가 소재를 예지하더니 수송하는 황금에 계략을 물어본다. 지명법사가 말한다. 내 신통력으로도 수송이 가능하다. 장래에 황금 운반을 하면 좋겠다. 이에 찬류공주가 운송서를 쓴다.
幷金置於師子前.師以神力.一夜輸置新羅宮中.眞平王異其神變.尊敬尤甚.常馳書問安否.薯童由此得人心,卽王位.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
병금치어사자전.사이신력.일야수치신라궁중.진평왕리기신변.존경우심.상치서문안부.서동유차득인심,즉왕위.일일.왕여부인.욕행사자사.
황금을 방치하고 사자와 앞서 병행을 한다. 어느 밤에 신라궁으로 황금 수송을 마쳤는데 진평왕은 신변이 다른 것이다. 존경이 더욱 심해졌다. 안부를 묻는 서문에 변함없이 바쁜 것이다. 서동은 지명법사를 움직여서 인심을 획득하였다. 하루는 임금으로 즉위를 한다. 왕과 부인이 함께 즉위한다. 사자사에 행렬을 가고 싶었다.
至龍華山下大池邊.爾勒三尊出現池中.留駕致敬.夫人謂王曰.須創大伽籃於此地.固所願也.
지용화산하대지변.이늑삼존출현지중.유가치경.부인위왕왈.수창대가람어차지.고소원야.
용화산 아래에 큰 연못 주변에 도착을 하는데 삼존불이 출현하여서 연못을 덮는 거 아니던가. 치경하려고 머물고 있는데 부인이 왕에게 말을 한다. 대가람이 이 땅에서 창궐을 해야 한다. 소원입니다.
王許之.詣知命所.問塡池事.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額日彌勒寺.
왕허지.예지명소.문전지사.이신력일야퇴산전지위평지.내법상미륵삼,회전탑랑무각삼소창지.액일미륵사.
임금이 허락을 하는데 예지력이 명령을 내리시니 모든 연못을 메꾸었는지 확인을 하는데 신통력이 작용하던 어느 밤 산사태가 생기고 메꿔둔 산이 평지로 변하였다. 미륵에 형상을 3회 보던 날에는 전탑과 랑무는 모여들게 각각 3개씩 창조를 하였다. 액땜 하는 날 미륵사 라고 하였다.
(國事云王興寺).眞平王遣百工助之.至今存其寺(三國史云是法王之子.而此傳之獨女之子.未詳).
(국사운왕흥사).진평왕견백공조지.지금존기사(삼국사운시법왕지자.이차전지독녀지자.미상).
(백제본기에서는 왕흥사다) 진평왕이 백공을 파견하여 조립하였는데 지금은 존기사 라고 한다. (백제사에서는 법왕지자로 인정하는데 독녀에 아들로 전하는 설도 있으니까 자세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