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자 연습

영문이 2018. 2. 2. 20:45

삼국사기 신라본기3 내물이사금 이병도 역

 

奈勿尼師今(내물이사금)

奈勿尼師今(내물那密(나밀)이라고도 함이사금)140)이 즉위하니, 그의 성은 (), 仇道葛文王(구도갈문왕)의 손자다. 아버지는 末仇角干(말구각간), 어머니는 (), 休禮(휴례)부인이요, ()(), 味鄒王(미추왕)의 딸이니, 訖解(흘해)가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므로, 奈勿(내물)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末仇(말구)味鄒尼師今(미추이사금)兄弟(형제)이다.
[史臣(사신)] ()한다. ()를 취함에 同姓(동성)의 사람으로 하지 아니함은 (夫婦(부부)) 다름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함이다.141) 그러므로 魯公[노공:昭公(소공)]()나라에서 장가든 것이라든지, 晉侯[진후:平公(평공)]四姬(사희)를 둔 데 대하여 ()司敗[사패:官名(관명)]142)()子産[자산:公孫僑(공손교)]143)이 크게 나무랐다. (그런데) 新羅(신라)와 같은 나라는 同姓(동성)[, ()]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조카)姑姨從姊妹[고이종자매:內從(내종)姨從(이종)]()하여 처를 삼기도 하였다. 비록 외국이 각각 풍속을 달리할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나무란다면 대단히 잘못이다. 匈奴(흉노)의 풍속에 어미를 [:()]144)하고 자식도 [:()]145)함과 같음은 이보다 더 심한 편이다.
2년 봄에 [()] 사신을 보내어 (:홀아비)(:홀어미)(:어버이 없는 어린이)(:아들 없는 늙은이)撫問[무문:慰問(위문)]하고 각각 곡식 3()146)씩을 주었고, 孝悌(효제)로 남다른 행실이 있는 자에게는 官職(관직) 1()씩을 주었다.
32월에 [()] 친히 시조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때) 廟上(묘상)에는 慈雲[자운:祥瑞(상서)]이 서리고 廟 庭(묘정)에는 神雀[신작:이상한 새=()]이 모여들었다.
74월에 始祖廟庭(시조묘정)의 나무들이 (서로) 가지를 ()하였다.
94월에 왜병이 크게 쳐들어왔는데, 왕이 듣고 이를 대적치 못할까 하여, 草偶人(초우인:풀로 만든 사람)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병기를 지니어 吐含山[토함산:慶州(경주)] 밑에 벌여 세우고, 용사 1,000명을 斧峴(부현) 東原[동원:지금의 東方里(동방리) ?]에 잠복하여 두었더니, 왜인이 많은 병력만 믿고 곧 진격하여 오는지라, 伏兵(복병)이 발하여 不意(불의)에 적을 치니 왜인이 크게 ()해 달아나자, 이를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11, 3월에 百濟人(백제인)來聘(내빙)하였다. 4월에 큰물이 나서 13개소의 산이 무너졌다.
13년 봄에 백제가 使臣(사신)을 보내어 좋은 말 두 필을 바치었다.
17春夏(춘하)에 몹시 가물어 흥년이 들고 기근이 일어나 사람들이 많이 流亡(유망)하므로 [()] 사람을 보내어 倉廩(창름)을 열고 구제하여 주었다.
18년에 百濟(백제)禿山城主[독산성주:未詳(미상)]300명을 이끌고 항복해 오므로 왕이 이를 받아들여 6부에 分居(분거)케 하였더니 백제왕이 (:편지)를 보내기를, "두 나라가 화합하여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지금 大王(대왕)이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이는 화친하는 뜻에 매우 어그러지며 내가 [平日(평일)] 대왕에게 바라던 바가 아니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보내 달라"고 하였다. 왕이 답하여 이르기를 "人民(인민)이란 것은 常心(상심)이 없는 고로 생각이 나면 오고 마음에 싫으면 가 버리는 것은 정한 일이거늘 대왕은 백성의 不安(불안)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寡人(과인)을 나무람이 어찌 그리 심하냐"고 하였다.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서울에는 물고기가 비에 섞여 왔다.
217월에 夫沙郡[부사군:未詳(미상)]에서 한뿔[一角(일각)] 난 사슴을 바치더니 (그 해) 크게 풍년이 들었다.
244월에 楊山[양산:南山(남산)]에서 小雀(소작)大鳥(대조)를 낳았다.
26春夏(춘하)에 가뭄이 있어 年事(연사)가 나쁘고 기근이 있었다. [()] 衛頭(위두)147)를 보내어 (高句麗使節(고구려사절)을 따라) 苻秦[부진:前秦(전진)]에 들어가 方物[방물:土産物(토산물)]을 전하므로, 苻堅[부견:秦王(진왕)]衛頭(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時代變革(시대변혁)名號改易(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 과거)와 같을 수 있으리요"148)라고 하였다.
334월에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6월에 또 지진이 있었으며, 겨울에는 얼음이 얼지 아니하였다.
34년 정월에 서울에 大疫(대역)이 유행하였으며, 2월에 흙비가 오고, 7월에는 누리가 있어 곡식이 되지 못하였다.
37년 정월에 高句麗[고구려:廣開土王(광개토왕)]에서 사신을 보내니 왕은 (이 때)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으로 伊飡(이찬) 大西知(대서지)의 아들인 實聖(실성)을 보내어 볼모를 삼았다.
385월에 왜인이 金城[금성:王城(왕성)]을 에워싸 5일 동안 풀지 아니하였다. 將士(장사)가 다 나가 싸우기를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에 있으므로 그 서슬을 당하기 어렵다" 하고, 이에 성문을 (굳게) 닫으니 적이 싸운 보람 없이 물러가는지라, 왕이 먼저 날쌘 騎兵(기병) 200명을 보내 적의 귀로를 막는 동시에 일변 步卒(보졸) 1,000명을 보내어 獨山(독산)149)에서 夾擊(협격)하여 크게 깨뜨리니 殺獲(살획)이 매우 많았다.
408월에 靺鞨[말갈:濊貊(예맥)]이 북쪽 변방을 침략하므로 군사를 내어 이를 悉直[실직:三陟(삼척)]들에서 크게 깨뜨렸다.
427월에 북변 何瑟羅[하슬라:지금의 江陵(강릉)]에서 가뭄과 누리가 있어 年事(연사)가 나쁘고 기근이 일어나므로, [()] 囚徒[수도:罪人(죄인)]曲赦(곡사)150)하고 일년간 조세를 면제하여 주었다.
447월에 飛蝗(비황)이 들에 가득하였다.
458월에 孛星[패성:彗星(혜성)]이 동방[東方(동방)]에 나타났다. 10월에 왕이 嘗御(상어)하는 內廐(내구)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었다.
46春夏(춘하)에 가뭄이 있었다. 7월에 고구려의 볼모[앞서 高句麗(고구려)에 보냈던 볼모] 實聖(실성)이 돌아왔다.
472월에 왕이 돌아갔다.


(null)


140) 奈勿尼師今(내물이사금) : 三國遺事[삼국유사:王曆表(왕력표)]에는 奈勿麻立干(내물마립간)으로 되어 있다. 同王(동왕) 27, 8년경에 前秦[전진:苻堅(부견)]에 사신을 보내어 美女(미녀)를 바친 일이 있었는데, 거기 관한 중국측 記事(기사)'其王樓寒遣使衛頭, 貢美女'라고 하였다. 樓寒(누한)王名(왕명)이 아니라 王號(왕호)麻立干(마립간)을 일컫는 것으로 당시 羅人(나인)書稱(서칭)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인 듯하니, ()'마루'訓讀(훈독)하면 麻立(마립)과 같이 볼 수 있고, ()()과 같이 取音(취음)한 글자일 것이다. 이로써 보면 麻立干(마립간)의 칭호는 三國遺事(삼국유사)王曆(왕력)과 같이 奈勿(내물)로 시작된 것이 확실한 듯하다. 麻立干(마립간)의 뜻에 대해서는 訥祇王條(눌지왕조)에서 말하려 하거니와 신라의 엄밀한 의미의 建國期(건국기)奈勿(내물) 때로 보아야 한다(17) 참조).

141) ()를 취함에 同姓(동성)의 사람으로 하지 아니함은 夫婦(부부)의 다름을 두드러지게 하고자 함이다 : 禮記(예기) 曲禮(곡례) () 坊記(방기)에 있는 말.

142) 司敗(사패) : 論語(논어) 述而章(술이장)에 보임. 司敗(사패)'司寇(사구)'와 같이 ()이나 ()官職(관직)이니, 本人(본인)의 이름은 자세치 아니함.

143) 子産(자산) :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 昭公(소공) 元年條(원년조)에 보임.

144) () : 下婬上日烝(하음상일증)이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奸淫(간음)하는 것이 ().

145) () : 5)의 뜻도 있으나, 여기는 특히 上婬下(상음하)의 뜻.

146) () : 十斗(십두)()이라 함.

147) 衛頭(위두) : 衛頭(위두) 이하의 記事(기사)太平御覽(태평어람) 所引(소인)秦書(진서)에서 이끈 것인데, 이 때는 新羅(신라)高句麗(고구려), 또 고구려와 前秦(전진)이 서로 親善中(친선중)에 있었으므로 麗使(여사)를 따라 前秦(전진)()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148) "이는 마치 중국의 時代變革(시대변혁)名號改易(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와 같을 수 있으리요" : 衛頭(위두)의 말은 당시 新羅(신라)政體變革[정체변혁:古代國家成立(고대국가성립)]을 의미함인 듯.

149) 獨山(독산) : 慶州邑誌(경주읍지) 山川條(산천조)'獨山一云鄕校山, 在神光縣東二里廣野中, 一小山?, 上有土城形二重, 其內有井, 大旱不渴, 俗傳鄕校基云'이라 한 獨山(독산)이 즉 이것으로, 지금의 延日郡(연일군) 神光面(신광면) 부근에 해당하나, 아직 필자는 實地(실지)를 답사하지 못하였다. 俗傳鄕校基(속전향교기)()라 함은 根據(근거) 未詳(미상). 혹 후세 神光縣(신광현)鄕校(향교)로 이용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50) 曲赦(곡사) : 罪人特赦(죄인특사)의 한 가지니, 어떤 地方的(지방적) 事情(사정)에 의하여 그 지방에 한하여 죄인을 사면하는 것.

 

 

奈勿尼師今

奈勿一云那密尼師今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末仇角干, 母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訖解薨, 無子, 奈勿繼之末仇味鄒尼師今兄弟也
論曰, 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 是故, 魯公之取於吳, 晉候之有四姬, 陳司敗鄭子産深譏之, 若新羅則不止取同姓而巳, 兄弟子姑姨從姉妹, 皆聘爲妻, 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 則大悖矣, 若匈奴之烝母報子, 則又甚於此矣
二年, , 發使撫問鰥寡孤獨, 各賜穀三斛, 孝悌有異行者, 賜職一級
三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紫雲盤旋廟上, 神雀集於廟庭
七年, 夏四月, 始祖廟庭樹連理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十一年, 春三月, 百濟人來聘, 夏四月, 大水, 山崩十三所
十三年, , 百濟遣使, 進良馬二匹
十七年, 春夏大旱, 年荒民飢, 多流亡, 發使開倉廩賑之

十八年, 百濟禿山城主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 答曰, 民者無常心, 故思則來, 斁則去, 固其所也, 大王不患民之不安, 而責寡人, 何其甚乎, 百濟聞之, 不復言, 夏五月, 京都雨魚
二十一年, 秋七月, 夫沙郡進一角鹿, 大有年
二十四年, 夏四月, 楊山有小雀生大鳥
二十六年, 春夏旱, 年荒民飢, 遣衛頭入苻秦, 貢方物, 苻堅問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名號改易, 今焉得同
三十三年, 夏四月, 京都地震, 六月又震, , 無氷
三十四年, 春正月, 京都大疫, 二月, 雨土, 秋七月, , 穀不登
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四十年, 秋八月, 靺鞨侵北邊, 出師大敗之於悉直之原
四十二年, 秋七月, 北邊何瑟羅, 旱蝗, 年荒民飢, 曲赦囚徒, 復一年租調

四十四年, 秋七月, 飛蝗蔽野
四十五年, 秋八月, 星孛于東方, 冬十月, 王所嘗御內廐馬, 跪膝流淚哀鳴
四十六年, 春夏旱, 秋七月, 高句麗質子實聖還
四十七年, 春二月, 王薨

 

내물이사금

내물[나밀이라고 알음]이사금이 김씨에서 정하였다. 갈문왕 손자라고 짝꿍이 전했다. 아빠가 구각간에서 꼴찌. 엄마는 김씨에 휴례부인이다. 왕비 김씨는 미추왕 궁녀이니, 궁녀 해부하다가 손주가 없어서 내물이 사왕자격을 챙긴 것이다. [말구는 미추이사금에서 형제니 말구각간을 말구로 보면 안된다.]

말이 말에게 마누라 고르기를 같은 성에서 고르지 않음은 이별이 두꺼운 까닭이요. 습관이 노나라 공자가 오나라를 캐취한다는가 진나라가 성씨 4개를 묻는다든가 진나라 공무원이 정나라를 정복한데에 손주가 생기자 깊게 트집을 잡는다든가. 신라국이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은 것은 형제자에서 고이사이 자매를 노예삼으니 몰려다니면서 마누라 홍보하였고, 외국이지만 풍속이 다르다거늘 예부책사가 중국이라서 큰 실수를 한 거지. 흉노국에서는 증모의 손주사랑이 고려보다 더 크다.

2, 봄에 사신이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인을 방문하여 서로 곡식 3곡을 은덕포장하였다. 효행, 공경이 눈에 띄어야 1등급 벼슬을 내렸다.

3, 2월에 조묘제사지내기를 몸소하였다. 자운이 묘받침대 위에서 돌고 있길래 귀신에서 까마귀가 묘정으로 모여들었다.

7년 여름4월에 조묘앞 뜰에 나무가 생기더니 서로 다르게 자랐다.

9년 여름4월에 일본인이 몰려와서 임금이 듣는다. 두려움이 아니라면 원수정도로 간주하고, 인형 수천개를 풀에다 세우고, 군복도 입히고, 토함산 아래에 진열하기로 입장을 정하고, 부현동 벌판에 용사 1천명을 숨기니 많은 일본인이 직진을 하였다. 복병이 명령아닌데 발격하여서 일본인이 크게 패한척 달리니까 추격하고 살인하는 순서가 소멸하였다.

11년 봄3월에 백제인이 소문듣고 왔다. 여름 4월에 홍수가 나서 산사태 난 곳이 13개다.

13년 봄 백제가 사신을 파견하였다. 2필을 선별하여 진상했다.

17년 봄에서 여름에 가뭄이 컸다. 기근에 거친 국민이 많아서 망하는게 유행탔다. 사신이 곳집을 열어서 곡식을 풀었다.

18, 백제 독산성 주인이 주민 3백명을 인솔하여 투항하였는데 임금에게 바쳤다. 6부에 나누어 살더니 백제왕이 옮겨둔 말에는 백제 신라는 좋은데에 통하여 형제라고 약정하자. 신라국 임금이 도민을 납품받았으니 형제라는 뜻이 엄청나게 깨졌다. 신라 임금은 응답하라. 구걸할테냐. ”응답한다. “내 맘에 백성이 없으니 고래 생각하기가 법이다. 싫어서 떠난 거. 국경선은 단단하다. 신라 임금은 백성 근심이 아니라 편안하지 않은 것이라며 평시 청문회는 얼마나 심해야 하는가.” 백제에서 듣고는 재차 말하지 않았다. 여름 5월에 경도는 고기시체가 떠다녔다.

21년 가을7월에 부사군에서 사슴뿔을 진상하니 진상품이 넉넉하였다.

24년 여름4월에 양산에서는 작은 참새속에 큰새가 품겼다.

26년 봄여름 가뭄이 기근과 황민을 양산하였고, 위두는 부진에 들더니 공물 정동태를 사견하고서 부견질문에 위두가 한 대답이 공무원이 하는 말은 해동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서 골동품 같은 게 아니다. 뭣 때문에부견이 하는 말에 중국에서도 혁신이 시대를 변모하게 하니까 개이라고 부른다. 똑같이 재현되어야 하는가?

33년 여름4월에 경도는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도 지진이 일어났다. 겨울에도 비가 안왔다.

34년 봄 정월에 경도는 전염병이 돌았다. 2월에는 흙비가 내렸다. 가을 7월에는 해충이 생겼다. 여러 곡식이 생기지 않았다.

37년 봄 2ᅟᅥᆼ월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다. 임금은 고구려가 강성하다며 이찬을 보내니 대서 자식이 간파하고서 실성공은 질이라고 하였다.

38년 여름5월에 일본인이 금성을 에워쌌다. 5일간 풀리지도 않았다. 선비 단체들이 출전을 보챘다. 임금이 인제 도둑을 버리고 술통이 깊게 들었으니 죽은 자들을 살펴보다가 싸울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하다가 성문을 닫는 척. 해치지도 않았는데 물러나더니 임금이 기병 200기를 먼저 보내고 퇴로에서 기다린다. 보병 1천명도 보내고 독산으로 추격한다. 끼여서 부딪치니까 서로 깨져서 동족 상잔이 심했다.

40년 가을 8월에 말갈이 북변을 침략하였다. 출사표에도 크게 깨졌다. 실직을 용서받았다.

42년 가을 8월에 북변 슬라지역에 어째 가뭄과 해충이 발생을 했길래 기근에 굶주려서 사수도인이 곧지 않게 되어 세금걷기가 뒤집어졌다.

44년 가을8월에 해충이 날다가 뜰을 덮었다.

45년 가을 8월에 동방지역에서 혜성이 별을 덮쳤다. 겨울 10월에 임금이 내구마를 일찍이 수리하여서 마굿간 주인이 꿇어앉은 무릎 아래로 눈물이 슬프게도 울렸다.

47년 봄 2월에 임금이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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